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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밀양 작원관지

  • 기사입력 : 2006-07-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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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란 왜적 진군 막은 `구국의 현장'

    삼랑진읍에 위치…주변 만어사·양수발전처도

        임진왜란 초 밀양부사 박진이 300여명의 관병과 지역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결사항전하던 곳으로 매년 음력 4월18일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는 밀양시 삼랑진읍 작원관지.
        작원관은 고려시대 이후 동남의 육로와 남북간 수로의 요충지로서 문경의 조령관과 함께 동래에서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과 국방의 2대 관문 중 하나이다.

        당시 김해와 밀양 등 낙동강 유역에 창궐하던 왜적들의 침공을 방비하던 요새였던 작원관은 작원진 나루터로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던 원. 관. 진의 역할을 수행했다.

        작원(鵲院)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 어느 임금이 만어사 행차를 위해 이곳 나루터를 건넜을 때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수많은 까치들이 지저귀며 임금 일행을 맞이하여 까치원이라 하였다는 설이 그 하나다. 또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백제의 군사를 맞아 싸을 때 백제의 왕이 위기에 몰리게 되자. 부왕을 따라 종군한 공주가 금까치로 변해 날아다니며 신라 진영을 교란시켰고. 백제의 왕은 이를 틈타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금까치는 김유신 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검세 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후 금까치가 날아간 마을을 금새라 했고 이 곳을 까치원이라 했다는 게 두 번째다.

        1592년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한 소서행장의 왜군 1만8천700명은 낙동강을 따라 밀양으로 진군했다. 그해 4월 18일 밀양부사 박진은 300여명의 병졸과 약간의 수병.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결사항전했고 더 이상 북진을 못한 왜적은 한밤 산기슭에 수천명의 군사를 매복시켜 놓았다가 이튿날 새벽 일제히 조총을 쏘며 아군의 배후를 기습공격하니. 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군사를 거의 잃고 후퇴하게 된다. 이것이 작원관 전투이며 거침없던 왜적의 진군을 늦춘 성공적인 전투로 평가된다.

        작원관 항전이 있은 지 400여년이 흐른 지금. 후세들은 이곳에 그날의 일을 돌에 새겨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길이 받들고자 위령탑을 건립해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주변의 관광지로는 만어사와 삼랑진 양수발전처. 숭진리 3층석탑 등이 있다.

    밀양=고비룡기자 gobl@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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