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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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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⑦ 전북 완주 송광사와 위봉산성

  • 기사입력 : 2005-09-2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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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의 옛 그림자 산사에 서려

      전주를 감싸고 있는 완주는 전주와 더불어 같은 길을 걸어왔지만. 전주의 그늘에 가려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백두대간 육십령 고개를 넘어 오고가던 가파른 길이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가까워졌다. 그러나 완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은 반감되었다. 예전에는 경남 함양군과 전북 장수군을 잇는 26번 국도를 따라 넘어가던 길에는 화림동(花林洞)이라 불리는 남계천의 경치 좋은 골짜기가 있다. 이 청계옥수의 계곡에는 농월정. 군자정. 거연정. 동호정이 있어 여행길에 자연을 누리는 행복감이 있었다.

      [송광사]

      매월교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십리 길은 봄이면 벚나무가 꽃 터널을 이룬다. 송광사라고 하면 누구나 얼른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를 떠올릴 것이다.

    <사진>송광사 개창비

      러나 지금 찾아가고 있는 곳은 전북 완주군의 종남산 송광사이다. 송광사 개창비에 따르면 고려의 보조국사가 전주의 종남산을 지나다가 영천수를 마시고 기이하게 여겨 장차 절을 경영하고자 했다. 보조국사는 전남 순천 송광사를 짓고 제자들에게 종남산에 절을 세우도록 지시했고. 제자들은 그가 죽은 후인 1622년(광해군 14년) 절을 짓기 시작하여. 14년이 지난 1636년(인조 14년) 벽암대사를 개창 조로 하여 완성을 보았다.

      송광사는 종남산 아래 널찍하게 펼쳐진 수만 평 대지 위에 터를 잡고 있다. 이른바 평지사찰이다. 평지사찰의 특징은 일주문 앞에 서기만 해도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있어 건물의 문들이 틀을 만들며 점차 작아지다가 대웅전 어간문 안의 어둠 속으로 수렴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1998년 완공한 대웅전 앞 현대식 석탑이 어간의 일부를 가리고 있어 아쉽다. 산지사찰과는 판이하게 다른 가람배치와 진입방식을 보면. 옛 백제 지역 사찰들이 보여주는 평지성의 면면한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일주문= 마을을 옆으로 냇가를 따라가다 절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로 기둥이나 여러 부재들이 유난히 가늘어 섬약해 보이는데. 그 때문에 포작에 받혀진 지붕이 하늘에 떠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사천왕문= 금강문을 지나 사천왕문으로 들어서면 흙으로 빚어 만든 4m가 넘는 거대한 사천왕상이 있다. 뛰어난 사실성과 세부묘사의 성실성보다는 서방광목천왕의 보관뒤쪽에 1649년에 조성되었다는 연대가 남아있어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제작 시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천왕문= 천왕문을 넘어서는 순간 우람한 대웅전 앞뒤로 흩어져 있는 전각들이 너른 대지 위에 점점이 분산되어 있는 모습이다. 어딘가 휑뎅그렁한 분위기가 온몸에 덮쳐온다. 건물들이 고립 분산적으로 독립해 있어 상호간에 유기적 연관성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건축물이 생활을 담는 그릇이라면 수행공동체를 지향하는 불가의 생활방식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대웅전= 송광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이다. 절이 창건될 무렵 처음 지어졌고. 1857년 중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2층으로 된 꽤 큰 건물이었는데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고쳐지었다. 그런 연유로 건물 각 부분 비례가 적정치 않고 처마가 깊지 않아 집 전체의 조화가 떨어진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천장의 꾸밈새가 다채롭다. 우물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 바다짐승 등 온갖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고. 반자틀에는 여러 가지 물고기·게·거북·혹은 자라 등을 조각하여 대웅전을 피안의 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으로 표현했다. 대웅전 계단 옆에 놓여있는 석등의 받침 같은 소맷돌이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정감이 갔다.

      △범종루= 우리 전통 건축에서는 아주 드문 십자형 평면을 가진 건물로 부재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매우 섬약하나 수많은 기둥과 처마 밑의 빽곡한 공포로 인하여 현란하고 화사한 느낌을 준다.

      △개창비와 부도밭= 대웅전 옆에는 편하게 걸터앉아 가을바람에 마음을 씻을 수 있는 세심정이 있다. 정자에 걸린 시를 읽어보며 잠시 쉬다 동북쪽 귀퉁이로 빠져나가면 절의 내력이 적힌 송광사 개창비를 만날 수 있다. 1636년에 세워진 개창비의 글을 짓고 전서를 쓴 사람은 선조의 부마였던 동양위 신익성이고. 글씨는 선조의 여덟번째 아들 의창군광이 썼다. 송광사의 험난했던 역사를 말하듯 개창비에는 한국 전쟁 때 입은 총탄자국이 선명하다. 돌각담이 정겨운 부도밭은 열여섯 기의 부도와 두 개의 비가 나란히 서있지만, 아늑한 맛은 없다. 모두 석종형 부도로 푸근한 맛은 없지만 좀더 관심을 기울여 관리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위봉산성과 위봉사]

      △위봉산성= 송광사에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고개 마루에 위봉산성의 서문 터가 있다. 산성은 전쟁이 나면 지리적으로 적을 방어하거나. 백성들을 피란시키기 위하여 쌓는다. 그러나 위봉산성은 조선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축성한 산성이다. 우리의 가치관으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사실이다. 왕조시대에는 태조 어진이 갖는 비중과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거웠던 모양이다. 조선 숙종 원년에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위봉산성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제구실을 한 적이 있다. 백성들의 품안에서 안전을 구해야 할 어진이 뭇매를 피하여 돌멩이로 쌓은 성에 의지하여 연명해야 했던 지배층의 모습이 씁쓸하기만 하다. 지금은 성안에 있던 시설도. 성에 담긴 사연도 모두 한줌의 흙과 한줄기 바람으로 돌아가고. 오직 남아있는 서문 터 홍예문 위에서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위봉사= 예전 위봉산성 안에는 열네 곳의 절이 있었다고 전하나. 오래 전에 모두 쓰러지고 홍예문을 지나면 단지 위봉사만 남아 있다. 위봉사는 백제 무왕5년(604)에 서암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유적이나 문헌은 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46개 사찰을 관할하는 본사가 되었으나. 1970년대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 두세 채만 남아있었다. 1990년 이후에 중창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는데. 일주문을 지나 앞마당을 보면 왜 이렇게 넓어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마당 가운데 그나마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와 쓰러져 가는 삼층석탑이 없었다면 더욱 허전했을 것이다.

      △위봉사 보광명전= 보물 제608호 위봉사 보광명전은 위봉사의 주불전이다. 기둥은 배흘림기둥과 민흘림기둥이 뒤섞여 있는데. 기둥의 굵기가 적당하여 안정감이 느껴진다. 귀기둥에는 우리 건축의 특색이자 고급건축 수법인 안쏠림과 귀솟음이 모두 적용되고 있어 시대가 올라감을 읽을 수 있다.

      △위봉사 관음전= 평면이 매우 드문 工자형이다. 그에 따라 지붕도 여섯 군데나 박공면이 생겨나 재미있는 구성을 보인다. 법당을 바라보는 쪽에 일제 강점기 해강 김규진이 글씨를 쓰고 죽농 서동균이 대나무와 난초를 한 폭씩 친 편액이 걸려있어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맛집: 화심 손두부 ☎ 063-243-8268]

      완주에는 8가지의 이름난 음식이 있으나. 순두부 백반을 잊을 수 없다. 우리 콩을 재래식 제조방법으로 만들어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묻어난다. 완주를 찾는 길손이라면 화심 순두부백반과 콩 도넛을 먹어보지 않으면 완주를 말할 수 없다고. 완주군청 최영주씨는 말한다. (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 회장·마산제일고등학교 학생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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