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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 통영 청마문학관

  • 기사입력 : 2005-05-26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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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리없는 아우성" 곳곳에 예술혼

     통영에 가면 청마가 살아 숨쉬고 있다. 깃발처럼 살다 간 청마가 우리의 마음속에 깃발로 남아 있다.


     가장 어려웠던 우리의 근대사에 있어 진정 `바위'처럼 살다 간 시인이자 교육자인 청마 유치환의 삶과 문학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청마문학관이 한산대첩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통영시 정량동 망일공원 언덕에 그림처럼 누워있다.

        ★ 청마문학관

     통영시 동호항 갯내음을 맡으며 철공단지 입구에서 좌측을 보면 부산 용두산 공원처럼 높다란 계단이 있다.


     한걸음 두걸음 45계단을 오르면 고즈넉한 청마문학관 간판과 함께 4천38㎡의 부지 위에 169㎡의 문학관과 57㎡의 생가가 시야에 들어온다.


     잘 가꿔진 잔디정원과 돌길을 따라 청마문학관 문을 열면 청마의 대표작인 `그리움'과 `깃발' 등 2편의 시가 방문객들을 반긴다.


     파도여 어쩌란 말이냐/파도여 어쩌란 말이냐/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청마문학관은 3개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청마의 생애와 작품세계, 청마의 발자취, 육필원고와 당시의 시집 및 잡지 등 유품 100여점과 각종 문헌 및 자료 350점이 전시되어 있다.


     올들어 청마문학관을 찾은 관람객은 4월말까지 6천500명, 시민 1천750명보다 관광객이 훨씬 많은 4천750명이며 지난해에는 1만7천265명이 다녀갔다.


     안내역을 맡은 문화유산해설가 권숙이(45)씨는 “관람객 가운데는 학생들이나 문학단체들이 많다”며 “문학단체는 청마의 시 세계에, 학생들은 청마의 일화에 관심이 많아 청마가 친구의 여동생 이영도 시조시인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고 귀띔한다.


     청마문학관장 신효철(45)씨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200평의 전용주차장과 휴게실을 갖추고 있다”며 “앞으로 관람객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에 대비해 각종 시설물을 확충하고 있다”고 밝혔다.

        ★생가

     청마문학관에서 산수화, 앵두나무가 심어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청마가 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초가집 한옥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사랑방과 광, 측간이 있는 2칸의 아래채와 3칸의 본채가 흙담장을 기어 오르는 담쟁이덩굴과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아련한 옛풍취가 떠오른다.
     유약국이란 간판이 내걸린 본채는 약방과 마루, 안방, 부엌 등이 있다.

        ★청마거리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의 `행복'이란 시는 이영도 시인과의 사랑이야기다.


     청마문학관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인 통영시 중앙동에 청마거리가 있다. 청마가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친 통영문화유치원(현 충무교회)과 청마가 주로 거닐고 책도 사고 편지를 부치던 지역이다.


     한빛은행 통영지점∼이문당서점∼충무우체국∼충무교회∼통영문화원(옛 통영문화협회)을 잇는 거리로 청마가 작품활동과 이문당 서점의 창문사이로 전해진 이영도 시인과의 사랑, 그리고 그리움에 편치를 부치던 당시의 우체국이 지금의 충무우체국이다. 통영=신정철기자 sinjch@knnews.co.kr

     


     


    청마 유치환은

        1908년 통영 출생…1931년 등단 
        정적·절명지 등 詩 1천여편 남겨

     청마는 1908년 7월 14일 통영시 태평동 552 유약국 집의 8남매 가운데 둘째(첫째 동랑 유치진)로 태어나 통영보통학교 4년을 거쳐 일본 동경의 풍산중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실패로 일본내의 학업을 접고 귀국하여 동래고보를 거쳐 연희전문대(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보수적인 학교분위기에 적응 못하고 중퇴한다.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을 끼고/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깃발처럼 다정하고/낯설은 산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내가 크던 돌다리와 집들이/소리없이 창가하고 돌아가던/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청마가 23살때 고향의 풍경을 노래한 `귀고(歸故)'라는 시다.


     이때 청마는 사람이 다스리는 세계는 떠나고 이념과 인연에 번뇌하며 현실의 공간에서 허공(이상)을 향해 상승한다.


     또 그의 연가(戀歌)는 그리움에서 출발하고 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연마는/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으으 너의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뇨/


     24살인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한 후 34년 신동아 4월호에 도시시초(時秒) 5편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시 세계를 연다.


     1939년 55편의 시가 수록된 첫시집 `청마시초'를 발간하기까지 9년동안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이다 1940년 재직중인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직을 내던지고 만주로 이주한다.


     자신의 회고록이나 자서전에는 만주로 떠난 사연을 기록한 것은 없지만 지인들이나 동료 문학인들은 친일단체인 문인보국회가 앞장서고 경찰서장이나 정보과장들의 유명예술인에 대한 친일강요에 못이겨 떠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만주에서 정미소 및 농장관리인으로 지내면서 `광야에서' `수(首)' `절명지'를 발표한다.


     45년 해방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온 청마는 통영여중 국어선생으로 교단에 서면서 67년 2월 교통사고로 숨질 때까지 교육자와 시인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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