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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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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1) 美港 전남 여수

  • 기사입력 : 2005-04-07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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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러지는 동백꽃 따라 마음까지 숙연해지고…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관광지, 문화유적들…. 이제는 알고 떠나자. 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 회장 심재근씨를 따라 깊이가 있는 우리땅 순례를 한다.

     여수는 동백의 고장이다. 동백(冬柏)은 말 그대로 겨울에 핀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백은 한겨울이라도 며칠간 따스한 날씨가 이어지기라도 하면 보란 듯이 꽃을 피우기도 한다. 이맘때쯤이면 봄의 전령사 동백은 지조가 있어 꽃잎으로는 떨어지지 않고 꽃봉오리채 뭉텅뭉텅 떨어져 또 다른 꽃 그림을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피는 고창 선운사의 동백은 보통 4월말에서 5월초가 되어야 비로소 얼굴을 내미는데, 이렇듯 지역에 따라 피는 시기가 다르지만 반가운 '봄의 전령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정유재란 일본군 주둔 '순천 왜성'… 조선인 포로수용소로 쓰여

     ▲순천 왜성
     여수로 답사 가는 길은 항상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순천에서 동남쪽으로 여수방향 25Km, 쯤 되는 바닷가에 섬처럼 돌출한 구릉에 순천 왜성 즉 일본 왜군들이 쌓은 신성리 성이 있다. 총 길이는 약 2Km에 달하며, 현재는 내성일부와 바다에 접한 외성 일부가 원형대로 남아있다.
     순천 왜성은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 선조 31년 9월에 소서행장이 축조를 시작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왜장들은 전라도 쪽으로 진격을 하면서 자신들의 공을 나타내기 위해 1차 침략 때와는 달리 귀 대신 코를 베기 시작하고, 이렇게 베어진 코가 전북 김제지역 한 곳에서만 삼천여 개였다고 한다. 수 만개의 코는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하니 그 당시 전쟁의 참상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왜군들이 재침략, 전주 점령 한 달 후에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 12척의 배와 수백 척의 일본 함대간 격전이 벌어지는데 이게 그 유명한 명량해전으로 일본군의 대패로 마무리가 된다.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일본군들은 퇴각하여, 소서행장은 이곳 왜성에서 약 11개월을 주둔하는데, 정유재란이 2년간 지속되었으니 전쟁의 약 절반을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왜군들은 장기 주둔을 하면서 일본으로 끌고 갈 조선인이 잠시 머무는 임시수용소의 역할을 했다고 하니, 이들의 만행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흥국사' 보조국사 지눌 창건… 입구엔 무지개 모양 돌다리 홍교

     ▲흥국사
     여수국가산업단지 이정표를 보고 쑥 들어가면 영취산 흥국사가 자리잡고 있다. 보통 여수 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오동도 향일암으로 가는데, 나는 항상 흥국사가 먼저이다. 입구에 닿으면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흥국사 홍교가 있다.
     개울 양 기슭의 바위에 기대어 쌓았는데, 부채꼴 모양의 돌을 서로 맞추어 틀어 올린 다리 밑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을 이루고 있다. 양옆으로는 둥글둥글한 돌로 쌓아올린 벽이 학이 날개를 펼친 듯 길게 뻗쳐 조화를 이루고, 홍예의 한복판에는 양쪽으로 마룻 돌이 튀어 나와, 그 끝에 용머리를 장식하여 마치 용이 다리 밑을 굽어보고 있는 듯하다.
     홍예 중심 머릿돌에서 양 홍예 난간 부분에는 귀면(도깨비)상을 조각함으로써 잡귀를 막아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옛 선조들은 다리 1개를 만들면서도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했다.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일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는 700명으로 조직되었다가 이듬해부터 300여명 정도로 정비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1812년까지 해체되지 않았다.
     부도 입구에서 왕벚나무 숲길을 따라 들어가면 흥국사 중수 사적기가 쓰인 비석이 있고, 잇따라 천왕문으로 들어서면 한단 높은 곳에 2층 누각인 봉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봉황루를 지나면 다시 이보다 한단 높은 곳에 2층 누각인 법왕문과 범종각이 있으며, 법왕문을 지나야 비로소 대웅전 앞마당에 닿게 된다.
     봉황루에 안치된 사물 가운데 사자가 법고를 이고 있는 모습과 범종을 걸어두는 걸개 용도의 용 조각이 주목할 만하다. 이렇듯 쉽지 않게 열리는 대웅전 앞마당은 또다시 대웅전과 신검당, 적묵당이 에워싸고 있다.

     

        다포식 팔작지붕 '대웅전' 보물 제369호… 용 거북 등 조각 눈길

     ▲대웅전
     마당에 들어서면 정작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보다도 대웅전을 받들고 있는 축대와 중앙계단의 소맷돌을 장식하고 있는 아기자기하고 천진스러운 용, 거북이, 게 등의 각종 조각들이 눈길을 빼앗아 간다.
     축대 여기저기에 드러난 조각들은 대웅전을 반야용선에 비유하는 법화 신앙적 표현이다. 법화신앙에서는 대웅전을 지혜를 실어 나르는 배, 즉 고통의 연속인 중생을 고통 없는 피안의 세계로 건너게 해주는 배라고 본다. 그러니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축대는 바다에 해당되는 것이고, 바다인 축대에 바다에 사는 용, 거북이, 게가 조각됨으로써 바다로 표현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괘불을 거는 지주 측면에는 화려한 용조각이 있고, 석등에서나 볼 수 있는 어리숙한 듯 천진 한 듯 만만해 보이는 거북이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 아래쪽은 바다임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웅전은 앞쪽에서 보면 봉긋한 영취산의 봉우리가 용마루 위로 솟아 올라와 마치 부처의 육계 즉 머리처럼 보이는데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보물 제 369호로 지정되어있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때 절이 모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인조 2년(1624)에 다시 세운 것이다. 불상 뒷면에는 숙종 19년(1693)에 그린 보물 제578호 석가후불탱화가 있고, 같은 양식을 가진 건물들 중 그 짜임이 화려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대웅전을 감싸고 있는 명부전, 팔상전, 원통전 등이 흥국사를 더욱 보배롭게 하고 있다.

     

        객사 진남관 우리나라 대표적 목조 건축물

     ▲진남관
     진남관은 1599년, 충무공 이순신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것을 진해루(鎭海褸) 터에 세운 75칸의 대규모 객사(客舍)이다.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鎭南館' 이라고 한 이 건물은 1716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 이제면 수사가 다시 지었고, 이후 크고 작은 수리를 거쳤으나, 당시의 중창이 오늘날 건물의 뼈대가 되고 있다.
     조선 후기 전라좌수영 내에는 600여 칸으로 구성된 78동(棟)의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진남관은 정면 15칸(54.5m), 측면 5칸(14.0m), 면적 240평의 대형 건물로 몇 안 되는 우리 나라 대표적 목조 건축물이다.
     장대한 진남관을 받치고 있는 기초는 직사각형 땅에 2줄로 반듯하게 기단을 쌓고 가장자리는 직사각형 다듬돌로 돌렸으며, 막돌(자연석) 덤벙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형 기둥 68개를 세웠다. 그리고 막돌 초석에 맞게 기둥뿌리의 밑둥을 다듬어 기둥을 단단하게 유지시키려는 고급 기술 그랭이 수법을 사용하였다.
     진남관 건너편 언덕에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6년 후인 1603년, 부하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여 세운 타루비와 충무공 이순신의 공훈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좌수영 대첩비를 함께 찾아 볼만하다.
     대첩비는 일제의 박해로 1942년 서울로 운반되어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광복 이후 해남지역 유지들의 수소문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 속에서 찾아내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고장 봉림사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간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일까?

     

        금거북 형상 금오산엔 해돋이 명소 향일암

     ▲향일암
     국내 최고의 해돋이 명소로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을 가진 향일암은 한국의 4대 관음 기도처 중 하나로 연일 사람들의 인파가 밀려들고 있었다. 향일암이 자리한 금오산은 풍수지리상 바다 속으로 막 잠수해 들어가는 금 거북의 형상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하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거북의 머리, 향일암이 세워진 곳이 거북의 몸체에 해당된다. 금오산에 있는 바위 표면은 거북이 등처럼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산 이름이 쇠 금(金)자, 큰 바다거북 오(鼇)자를 쓴 금오산이다. 넓지 않은 절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취성루, 요사채 등이 있다. (옛그늘 문화유산답사회장)
     

     Tip. 먹을거리
     ▲갓김치
     여수의 특산물은 갓김치이다. 갓김치는 돌산도를 포함한 여수의 별미인데, 여수 갓은 잎이 크고 향이 좋으면서도 톡 쏘는 매운맛이 덜해 인기가 높다. 오동도 향일암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여수의 특산물 갓김치를 비롯하여 굴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지나가는 손님에게 하는 호객행위도 애교 스럽다. 구수한 사투리에 갓김치를 찢어 입에 넣어주면서 호객을 하고 있는 '맏며느리' 돌산 갓 김치에서 1㎏에 1만원이다.
     ▲서대회
     진남관 아래쪽 오동교가 지척에 보이는 여수시 중앙동 구백 식당에는 경상도에서는 다소 생소한 서대횟집이 있다. 서대는 여수에서 즐겨먹는 생선으로 맛이 담백하고 부드럽고 비리지 않아 회, 찜, 매운탕으로 애용되고 있고 서대회는 막걸리를 삭혀서 만든 식초로 회를 무쳐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생소한 것이어서 답사 회원 중에 어린이들이 먹기를 꺼려하니 구수한 전라도 인심의 주인 아주머니는 싱싱한 갈치를 구워 손님대접을 섭섭하지 않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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