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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13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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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흘러도 마음에 새긴 가르침은 생생… 문신은 우리의 스승”

[기획- 문신을 잇는 마산의 예술가들] 문신의 ‘마산 15년’ 함께한 오창성·김복수씨

  • 기사입력 : 2024-05-26 20:5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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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교사였던 오창성·김복수
    무학화가협회서 문신 처음 만나
    2년여간 작업 도우며 이야기 나눠
    흑단을 재료로 한 작품 모두 손길

    근면·독창적 세계 등 조언 새기며
    보조 끝난 뒤에도 교류 이어나가
    늘 지역 미술관 건립 꿈꾸던 문신
    1994년 미술관 개관 이듬해 타계

    문신과의 교류서 얻은 교훈으로
    자신만의 독창적 예술세계 구현
    오창성, 사상체계 오방사유도 승화
    김복수, 조각·회화 등 창작 활동


    문신은 이방인으로도 불린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 열여섯에 일본으로 넘어가 7년을 지내고 돌아왔으나 마흔 무렵 다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20년을 살았다. 예순을 앞두고 마산 추산동에 완전히 정착했던 이방인은 고향의 정이 그리웠다. 마산에는 그가 갈구했던 정을 주고받은 이들이 있었다. 문신을 사랑한 마산의 예술가 오창성(77)·김복수(75) 선생이다. 이들은 돌아온 문신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보필했고, 작업을 도왔다. 문신은 제자가 없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오창성·김복수 선생은 스스럼없이 문신을 스승이라 칭했다.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의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문신과 그와 함께했던 예술가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오창성(왼쪽)·김복수 선생이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30주년 기념전 ‘문신이 사랑한 마산’에 전시 중인 문신의 흑단 조각 작품 앞에서 문신과 함께한 시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흑단을 재료로 한 문신의 조각은 모두 이들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문신이 흑단으로 작품을 제작했던 2년간 사포질 등을 도왔다./전강용 기자/
    오창성(왼쪽)·김복수 선생이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30주년 기념전 ‘문신이 사랑한 마산’에 전시 중인 문신의 흑단 조각 작품 앞에서 문신과 함께한 시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흑단을 재료로 한 문신의 조각은 모두 이들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문신이 흑단으로 작품을 제작했던 2년간 사포질 등을 도왔다./전강용 기자/

    ◇고향으로 돌아온 문신을 만나다= 1980년 10월, 문신이 마산으로 귀국했다. 돌아온 문신은 마산에서 활동하는 무학화가협회의 고문으로 추대되며 마산의 예술가들과 빈번하게 교류했다. 오창성·김복수 선생 또한 무학화가협회 소속이었다. 같은 해 12월 말, 말로만 들었던 위대한 조각가 문신을 처음 보게 됐던 날은 아직도 이들의 기억에 생생하다.

    오창성: 금의환향이었다. (문신) 선생님은 오시기 전부터 이미 화가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10월부터 2개월간 화가들이 모였다 하면 선생님 얘기를 했다. 그러다 12월 27일 즈음인가, 가야백화점에서 무학화가협회 전시를 할 때 경남신문 편집국장이었던 안윤복 선생님이 문신 선생님과 부인인 최성숙 여사(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장)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협회의 고문으로 모시게 됐다.

    김복수: 처음엔 ‘문신이 왔다’ 하고 다들 흥분을 했는데, 선생님이랑 함께 들어오는 최 여사님이 더 돋보이더라. 모델같이 예쁘신데 경기여고에 서울대에 프랑스 파리 유학까지 다녀온 그런 지성미도 있지 않나. 선생님과 여사님은 단번에 화가들 사이에서 흠모의 대상이 됐다.

    문신이 마산으로 돌아온 그다음 해인 1981년 초, 오창성과 김복수 선생은 문신의 집에 처음 발을 들였다. 문신은 집에서는 언제나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보던 이들은 자처해 문신의 작업을 도와 사포질을 시작했다. 오 선생은 1년여간 최성숙 관장에게 주말 오후 그림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보조는 2년간 이어졌다. 당시 오 선생은 무학초등학교, 김 선생은 만월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퇴근한 후에 문신의 집으로 가 작업을 돕고 밤이 깊어서야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날이 계속됐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문신과 교류했다. 흑단을 재료로 탄생한 작품은 모두 이들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창성 선생은 문신과 찍었던 사진을 소중히 보관해왔다. 이전까지 공개된 적 없는 미공개 사진들이다. 문신(왼쪽)이 자신의 방에서 오창성과 함께 있다./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오창성 선생은 문신과 찍었던 사진을 소중히 보관해왔다. 이전까지 공개된 적 없는 미공개 사진들이다. 문신(왼쪽)이 자신의 방에서 오창성과 함께 있다./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오창성(맨 왼쪽)과 가족이 문신(가운데)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오창성(맨 왼쪽)과 가족이 문신(가운데)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김복수: 그냥 선생님 집에 한번 갔는데 안에서 작업을 하고 계시더라. 나도 당시 조각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몰입은 정말 대단했다. 작품을 도우면서 느낀 것은 작품에서 섬세한, 정말 작은 빈틈도 허용을 하지 않는 분이었다는 거다. 작품은 완벽했고 그것을 돕는 일이 좋아서 밤 가는 줄 모르고 했다.

    오창성: 당시 선생님 외에 흑단으로 작품을 하는 사람이 없었을 거다. 흑단이 참 다루기 힘든 재료다. 빼빠질(사포질)을 하는데 그 가루가 고춧가루처럼 매웠다. 그래도 참 즐거웠다. 당시 12시 통금이 있었던 때인데, 그런 것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나는 화가인데 빼빠질에는 그때 도가 터서,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지팡이도 스스로 다듬었다. 박철이라는 지팡이 장인이 내 솜씨에 놀라기도 했다.

    문신(첫번째 줄 가운데)의 경남도청 제막식에서 관계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창성(둘째 줄 맨 왼쪽)이 제막식의 사회를 진행했다./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문신(첫번째 줄 가운데)의 경남도청 제막식에서 관계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창성(둘째 줄 맨 왼쪽)이 제막식의 사회를 진행했다./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문신의 옆에서 그의 정신을 보다=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함께 생활하고 신처럼 창조한다.’ 문신의 묘비에도 적혀있듯 문신은 자신의 온 에너지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문신은 작업을 끝마친 저녁마다 이들에게 “꼭 죽을 것만 같다”고 말했다. 밤새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서 목욕을 한 뒤 정갈한 잠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오창성: 작품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 어떻게 생명을 주냐 했더니 “모든 우주 만물 형태의 기본은 원과 선이고, 그것을 입체로 표현했을 때 우리는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김복수: 선생님은 온종일 작업을 했다. 예술가들이 바깥에서 술 먹고 노는 것도 눈살을 찌푸리는, 작품에 대한 근면을 중요시 생각했다. 선생님은 쉬는 시간에 정원에 물을 주고 꽃을 가꾸고 또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채화’였던 것 같다.

    문신은 사람과의 교류가 적은 편이었다. 큰 행사에는 자주 참여했지만 그 외에는 오로지 작업을 했다. 그렇기에 지역 예술가로서는 작업을 돕고 언제나 그를 보필했던 오창성·김복수 선생이 문신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문신은 과묵하다고 알려졌지만 이들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오창성: 나는 당시 파리 유학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파리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봤는데, 나중에 가서는 물어보지 않아도 파리에 있었던 얘기를 다 해주더라. 파리에 처음 갔을 때 배고파서 죽을 뻔했다거나 고성을 수리할 때 허리를 다쳐서 고생을 했다는 얘기, 이응노 화백을 만난 일화 같은 것들이다. 특히 파리 작가들의 정신을, 나아가 작가 철학을 많이 언급했다.

    문신이 제자를 들이지 않은 것도 문신이 강조했던 ‘작가 정신’에 있다. 문신은 한국 미술계에 제자가 스승의 작품을 모방하게 되는 병폐에 대해 자주 꼬집었다. 같은 맥락으로 공모전 출품에 대해서도 “자신의 세계를 남에게 보여서 평가해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오창성·김복수 선생은 문신의 가르침 이후 도전, 국전 등 공모를 신청한 적이 없다.

    김복수: 선생님이 제자를 두지 않은 것은 자신의 그림을 따라할까 우려돼서다. 한국 미술계에 흔한 일이었으니까.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선생님은 ‘작가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가져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라고.

    오창성: 공모전 그림을 내지 말라고 하셨다. 그럼 우리가 인정을 받겠습니까? 되물으니 ‘다 인정받게 돼 있다. 당장 내가 알아주잖아’라고 말했다. 그래서 공모전을 안 했어도 지금까지 후회 하나 없다.

    오창석 선생이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전강용 기자/
    오창석 선생이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전강용 기자/

    ◇문신을 떠나보내다= 문신이 흑단을 재료로 쓰지 않기 시작하면서 오창성·김복수 선생의 작품 보조는 끝이 났다. 대신 얘기를 나누러 자택에 가거나 문신의 서울 전시나 행사 일정을 따라다니는 등 교류는 계속 이어갔다.

    오창성: 선생님이 나를 계속 조수로 두고 싶었는지 월급을 얼마나 받느냐고 캐묻고 내 의향을 묻기도 하더라. 근데 내 월급이 조수비의 몇 배가 되니 부담스러워서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이후로도 선생님을 보좌했는데, 선생님이 각종 우편물을 보낼 때 편지봉투의 글씨는 내가 담당했고 전시회 사회는 물론 손님 안내도 내가 했었다.

    김복수: 선생님이 석고 틀을 만들고 그런 작업을 할 때부터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의 동생인가, 젊은 조수가 붙게 됐다. 손이 참 야무진 사람이었는데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문신은 이들에게 미술관 건립에 대한 얘기를 자주 꺼냈다. 사택이 위치한 동산에 미술관을 짓는 것은 문신의 오랜 꿈이었다. 꿈은 순탄치 않았다. 미술관 공사 시작 전후로 다사다난한 사건이 많았다.

    김복수: 선생님은 외국에 나가 계시면서도 다른 미술관들을 보면서 지역에 저런 미술관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하신다. 오랜 꿈이었기에 간절했다. 지역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오창성: 건설 허가 문제로 골머리 앓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 텃세를 부려서 내가 나서서 싸우기도 하고 일이 많았다. 공사 때는 비가 참 문제였는데, 어느 날은 폭우가 오길래 선생님께 전화 드려서 어떠냐고 물으니 “큰일 났다”고 해서 찾아갔다. 산사태가 나듯이 난리가 났는데, 이튿날 새벽에 보니 일부러 만든 것처럼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지금 폭포가 흐르는 저 큰 바위가 그것이다. 되레 멋지다고 했다.

    1994년, 각고의 노력으로 문신미술관이 개관했다. 꿈을 이룬 문신의 환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5년 5월 24일, 문신은 자신이 평생 탐구해왔던 ‘우주’로 이주했다. 향년 73세였다.

    김복수 선생이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전강용 기자/
    김복수 선생이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전강용 기자/

    ◇문신은 ‘스승’이다= 세월이 흐르니 어느덧 존경했던 ‘선생님’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 이들은 아직도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린다. 가르침을 들었던 것은 수십년 전이지만 매번 문신의 조언들이 가슴 속에 새겨져 있다. 제자를 두지 않았던 문신이지만, 문신의 곁에서 그의 정신을 들어왔던 이들에게 문신은 ‘스승’이다.

    두 작가는 교직생활을 하면서도 문신의 뜻에 따라 독창적인 작가 세계를 구축했다. 한국화를 기반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오창성 선생은 ‘우리나라의 동서남북과 중심을 깊이 생각하자’는 본인의 고유한 사상체계도를 ‘오방사유도’라는 이름으로 승화했다. 다양한 그의 작품 중에는 마산의 풍경화도 있다. 문신의 자택을 처음 방문했을 때 보게 된 풍경으로 마산의 미래상상도나 마산 앞바다 풍경화는 그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김복수 선생은 조각으로 시작해 문신을 만난 이후로는 회화까지 영역을 늘려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조각과 회화를 병행한 문신과 같이 전시를 할 때면 전시장 벽면에는 회화를 함께 전시했다. 의령이 고향인 그는 어릴 때 느끼던 고향을 회화로써 자신만의 세계에 담아내고 있다.

    오창성: “마음의 창을 열어두라”고 했다. 작품을 구상하고 만드는 마음의 대문은 열두 대문과 같아서 한 번 닫히면 그 열두 대문을 여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하루도 쉬지 말고 항상 작업하라는 말이다. 그 말 이후로 그림 그리길 쉰 적이 없다. 21년째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쓰고 있는, 길이 26㎞가 넘는 붓글씨 두루마리 작품 ‘한라에서 백두까지 말씀띠 잇기운동’은 아직도 진행하고 있다.

    김복수: 선생님의 조언으로 모방이라는 것을 늘 경계했다. 조각을 하던 사람으로서 선생님의 작품을 사포질하면서, 작품을 구상할 때 선생님의 작품이 많이 떠올랐는데 그걸 탈피하기 위한 노력이 많았다. 내가 작가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만드는 데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컸다.

    이들은 입을 모아서 얘기했다. “문신 선생님은 우리의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마음 깊이 존경했고 또 흠모하고 있노라고.

    어태희 기자 ttott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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