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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2월 2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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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③ ‘해병대 3기’ 김종갑씨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구사일생… 해병은 죽지 않는다

  • 기사입력 : 2024-02-07 19: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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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학생때 전쟁 터지자 창원으로 귀향
    나라 구하겠다는 생각에 해병대 입대
    교육 후 제1전투단 통신병으로 배치

    서울 수복 후 원산상륙·도솔산 등 투입
    치열한 전투 중 팔·허리 중상 입기도
    공적 인정돼 3차례 대통령 표창 받아

    같이 입대한 친형 유해 찾는 게 소원
    끔찍한 전쟁, 후세는 절대 겪지 않길
    국민들이 참전 영웅 기억해줬으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4글자를 지키기 위해 해병대에 입대했지. 국호가 없는데 충성할 나라가 있을 수 있나….”

    전쟁이 무엇이기에 18살 어린 학생이 총과 칼을 들어야 했을까. 학교에서 꿈을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같이 군에 들어간 친형의 생사도 모른다. 70여년이 넘은 세월이지만, 전쟁에 대한 그의 기억은 현재 진행형이다. 6·25전쟁 참전 영웅 김종갑(92)씨는 전쟁의 아픔과 미래 세대에 대한 부탁을 들려줬다.

    김종갑 6·25 참전유공자가 해병으로 참전한 서울수복작전, 원산상륙작전, 도솔산 전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종갑 6·25 참전유공자가 해병으로 참전한 서울수복작전, 원산상륙작전, 도솔산 전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해병대 3기로 입대= 창원이 고향인 김종갑씨는 전쟁이 터진 1950년 대전 해운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와 해병대 3기로 입대한다. 그가 입대한 날짜는 8월 15일. 그는 입대 당시 해병대가 마산을 방어하기 위해 진동리 지구 전투를 벌일 때였다고 설명했다. 입대 후 군사교육을 받고 통신병으로 해병 제1전투단으로 배치된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그는 9월 28일 서울수복작전에 투입된다. 앞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국군과 UN군은 인천에 주둔 중인 인민군 소탕 작전에 들어갔다. 이후 UN군과 국군은 서울 수복을 위해 진격했고, 치열한 시가전이 펼쳐진다. 통신병이었던 그는 늘 저격의 위험에 노출됐다. 통신병을 사살해야 적의 통신을 차단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갑(92세) 6·25 참전유공자가 해병으로 참전한 서울 수복 작전, 원산 상륙 작전,도솔산 전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종갑(92세) 6·25 참전유공자가 해병으로 참전한 서울 수복 작전, 원산 상륙 작전,도솔산 전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종갑(92세) 6·25 참전유공자가 해병으로 참전한 서울 수복 작전, 원산 상륙 작전,도솔산 전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종갑(92세) 6·25 참전유공자가 해병으로 참전한 서울 수복 작전, 원산 상륙 작전,도솔산 전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인민군은 서울시민들을 동원해 산들과 시가지에 진지를 구축해 저항했다. 하지만 미군의 공중 폭격과 전차 공격에 서울은 함락된 지 3개월 만에 아군이 수복했다. 서울 수복 이후 국군은 통일을 목표로 북진을 이어간다. 김종갑씨가 속한 해병 제1전투단도 부산으로 이동해 ‘원산상륙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전쟁 당시 함경남도 원산은 북한의 군사·교통 요충지로 얼지 않는 부동항과 비행장을 보유했다. 소련 군수품 지원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원산에는 정유공장, 철도 등 다양한 산업시설이 자리 잡았기에 아군이 점령해야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0월 2일 미군과 국군은 원산에 상륙해 약 한 달간 치열한 교전을 벌인다. 그도 원산 점령을 위해 부산에서 상륙함에 탑승해 3일 동안 이동했다.

    “원산에는 석유화학단지가 있어서 그쪽에는 폭격하지 않았지. 수색조가 먼저 투입돼 이상이 없다고 알려주면 작전을 시작했어. 그때는 두렵다는 감정보다는 젊은 혈기에 무작정 달려갔지. 상륙하기 전에 미군들이 조그만 병에 담긴 위스키를 나눠줬는데 그걸 마시면 열이 확 올라오고 두려움은 사라졌어.”

    점령 후 그가 본 원산은 남한과 달리 많이 발전해 있었다. 당시 원산 지역 주민들의 학력은 최하 중졸이었고, 전문학교 졸업도 많았다고 한다. 또 일반 가정에도 수세식 변기가 있었으며, 식단도 남한보다 좋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원산상륙작전 성공 이후 통일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중국인민해방군 참전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결국 퇴각하기에 이른다. “북쪽에서 수송함을 타고 내려올 때 북한 피란민들도 같이 타고 내려왔어. ‘김치 파이브(5)’이야기 알지? 그때 이야기야. 배 타고 내려오다 울릉도 앞바다에서 갑판이 찢어져 침몰당할 뻔했으나 용접을 해 살았지. 진해에 도착해 다시 훈련도 하고 새 장비를 받아 정비를 했어.”

    군 생활 당시 사진./김승권 기자/
    군 생활 당시 사진./김승권 기자/
    김종갑씨(맨 왼쪽 위)가 1954년 1사단에서 근무할 당시 전우들과 찍은 단체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김종갑씨(맨 왼쪽 위)가 1954년 1사단에서 근무할 당시 전우들과 찍은 단체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해병 신화 쓴 ‘도솔산 전투’= 1951년 6월 해병대 제1연대는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강원도 양구군 도솔산을 뺏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치렀다. 도솔산은 양구와 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를 끼고 있어 아군이 확보하지 못하면 북진 중인 국군 진격이 지체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도솔산의 24개 고지에는 인민군 4200여명이 지키고 있었다. 고지 곳곳에 지뢰를 매설해 해병대 공격에 저항했다.

    김종갑씨는 전투 중 오른팔에 유탄을 맞아 다치기도 했다. 다행히 미군 부대에 후송돼 응급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같이 작전을 수행했던 김대식 중령은 인민군 지뢰에 발목이 잘렸다.

    해병대는 밤에 기습 작전을 감행해 고지 탈환에 나섰고,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했다. 이 전투로 인민군 2200여명이 사살됐고, 아군 또한 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치열했던 전투인 만큼, 해병대 5대 작전으로 기록됐다. 이후 해병대 제1연대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과 함께 ‘무적 해병’이라는 친필 휘호를 받았다. 전쟁 중 김씨도 공적을 인정받아 1950년, 1952년, 1953년 3차례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도 그는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동 중이던 트럭이 전복돼 허리를 크게 다친 적도 있다. 그때 부상으로 그는 지금도 허리 통증을 호소한다. 전투 중 중공군 부대에 포위되어 10일 가까이 고립된 적도 있었다. 고립이 길어지면서 일주일 동안 굶었다. 고립된 병사들은 소나무 껍질을 씹어 먹으며 견뎠다. 미군기가 낙하산으로 보급품을 전달했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어 적진으로 넘어간 적도 많다고 한다.

    “중공군은 끝없이 밀려 들어오는데 식량과 탄약이 떨어졌어. 정말 무서웠지. 이제는 진짜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미군기가 식량과 탄약을 낙하산으로 떨어뜨려 줘 적의 포위를 뚫고 탈출했지.”

    김종갑(92세) 6·25 참전유공자가 한국 첫 탱크대대 수료증과 전역 증서를 들어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종갑(92세) 6·25 참전유공자가 한국 첫 탱크대대 수료증과 전역 증서를 들어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종갑씨의 해병교육단 방첩수사과 신분증.
    김종갑씨의 해병교육단 방첩수사과 신분증.
    김종갑씨의 해군 전역증서.
    김종갑씨의 해군 전역증서.

    ◇목숨 걸고 싸운 보답 형편없어= 그는 휴전이 됐다는 소식을 서부전선에서 듣게 된다. 그는 이전에 휴전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기에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제 고향에 갈 수 있구나. 지금까지 죽을 뻔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온몸이 오싹했지. 긴장을 놓으니 오히려 무서웠던 기억이 나는군.”

    그가 해병대에 입대하고 20여 일 뒤 친형도 군에 들어갔다. 이후 형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형이 낙동강 방어 전투에서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형님의 유해라도 찾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형님은 사실상 가장이었다. 형님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자 김씨는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고, 어려운 형편에 악착같이 살았다고 한다.

    김종갑(92세) 6·25 참전유공자가 해병으로 참전한 서울 수복 작전, 원산 상륙 작전,도솔산 전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종갑(92세) 6·25 참전유공자가 해병으로 참전한 서울 수복 작전, 원산 상륙 작전,도솔산 전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종갑(92세) 6·25 참전유공자가 해병으로 참전한 서울 수복 작전, 원산 상륙 작전,도솔산 전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종갑(92세) 6·25 참전유공자가 해병으로 참전한 서울 수복 작전, 원산 상륙 작전,도솔산 전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그는 휴전 후 방첩대에 근무한 뒤 1956년 제대했다. 이후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하며, 가정을 꾸려 나갔다.

    만약 다시 1950년으로 돌아가면 다시 전쟁에 참전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로 돌아가도 참전하겠지. 단, 지금처럼 정부에서 참전 영웅들을 푸대접한다면 절대 안 갈 거야. 내 자식들도 군대 안 보낼 거야.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는데 단돈 몇만원 주고 정부에서 생색내는데 정말 화가 나. 중국, 북한도 참전 영웅들에게 우리나라보다 더 좋은 대접을 해줘. 정부에서 보훈 정책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 다시 국가를 위해 싸운다?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

    그는 본인이 겪은 전쟁의 아픔을 후세들이 겪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는 2011년부터 6·25 참전유공자회 경남도지부에서 운영하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6·25 실증교육’ 강사로도 활동했다. “전쟁은 인간의 욕심이야. 미래 세대들이 전쟁을 기억하고, 공부해 다시는 이런 끔찍한 비극을 겪지 말아야지.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참전 영웅들을 좀 더 정부에서 대우를 해주고, 국민들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마지막 부탁이야.”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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