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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둘러서 가라는 지리산 둘레길- 차재문(연강산업 대표이사·수필가)

  • 기사입력 : 2023-05-21 19: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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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월은 초록 잎사귀의 계절이다. 가지 끝마다 초록물이 넘실거린다. 눈부신 5월의 초록은 나무의 함성이다. 작은 잎사귀를 매단 어린 나무들이 키 큰 나무 사이로 햇빛을 받으려 용틀임을 한다. 생명의 몸짓이다. 그곳에는 매일 초록이 자라고 성장의 설렘으로 가득하다.

    나는 290㎞ 남짓 되는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을 두 번 걸었다. 첫 번째는 시간을 즐기며 천천히 걸었고 두 번째는 생각을 모으고 메모를 끄적이며 걷다가 이 소중한 지리산 둘레길을 내 이웃과 벗들에게 알리고 공유하고 싶었다. 한 구간마다 3편의 글을 쓰고 21구간에 63편의 산문 글을 남겼다. 곧 책이 출판되면 그 발자국과 땀방울이 고스란히 다시 살아날 것이다.

    둘레길은 둘러서 가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세상은 일순간 바뀌지 않는다. 꽃은 한순간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풀도 단박에 땅속에서 올라오지 않는다. 그게 세상 이치고 엄연한 자연 생태계의 법칙이다. 그 단순한 법칙을 깨닫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날마다 새벽잠과 싸우면서 몸으로 글을 쓰고 생각으로 지리산 자락을 걷는 꿈을 꾸었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걸음을 뗄 때마다 나 자신을 만났다. 나는 60대의 몸과 사고로 지리산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청춘의 기백을 소환했다. 삶의 근원적 질문을 해대다 보면 특별한 것 없는 존재라도 그 유일성과 독창성을 각성하게 된다. 하찮아 보이는 우리 삶도 긴 호흡으로 보면 특별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만물이 영감을 얻고 존엄성을 찾아가는 곳. 겨울에 담금질하고 여름에 물레질하는 곳. 낯설면서 익숙한 지리산 풍경이다. 험준한 지리산을 왜 ‘어머니 산’이라 부르겠는가. 골이 깊은 만큼 고원이 넓고 산자락이 풍성해서 그렇다. 운봉고원, 인월고원, 구례고원은 태생이 평등하다. 숲의 초록색 나무와 풀들은 모두 평등 전사다.

    초록이 절정인 이즈음의 숲에서 역설적으로 초록의 위기도 느낀다. 지난 엄동에 만난 산죽과 구상나무들이 수분부족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라 갔다. 함박눈이 펑펑 퍼부어야 그 수분을 저축해 봄날을 넘길 수 있는데 더워진 지구는 눈도, 비도 메말랐다. 속절없이 말라가는 나무를 보며 기후 위기가 기후 정의의 문제임을 생각한다. 속도를 줄이고 욕망의 크기를 줄이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수용 가능한 지구의 환경 용량은 얼마인지. 지금 개발에 신음하고 있는 지리산은 감당하고 있는지. 나에게 차분하게, 우리에게 격하게 묻는다.

    지리산 둘레길은 역사길이다. 둘레길 구간마다 왜구의 침략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고통이 서려 있다. 해방공간과 6·25 한국전쟁의 상흔도 곳곳에 남아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온순하게 모든 생명을 자연의 카테고리에 의지한 마을공동체를 일구었다. 그 마을 풍경은 숲과 어우러져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자연이 되었다.

    숲에 들어서는 순간, 나무들의 두런거림을 느낀다. 묵묵히 둘레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 속의 돌덩이는 가벼워져 있고 나 또한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동화된다. 오늘의 숲은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까?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늘도 한 걸음 둘러서 걷는다.

    차재문(연강산업 대표이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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