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3일 (화)
전체메뉴

[작가칼럼] 매화, 청량한 행복- 하순희(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23-01-19 19:17:32
  •   

  • 바닷바람이 차다. 지금쯤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고향 산청엔 밤새 하얀 눈이 설설 내리고 함박눈의 무게를 못이겨 휘어진 대나무가 폭죽처럼 펑펑 터지고 있으리라. 그런 날 꽁꽁 언 손을 김이 솔솔 오르는 솥전에 녹여주시며 추위가 힘이 세어도 새봄이 오고 있는 거라고 일러주시던 어머니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남새밭가에는 하얀꽃을 두둥실 피우는 매화가 그 맵찬 추위 속에서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을 것이다.

    매화는 선비의 기개를 지닌 꽃이라고, 엄동을 지나가듯이 힘든 일도 이겨내면 좋은 일이 온다고 일러주시던 선친의 말씀도 어제련 듯 선연하다. 그런 연유로 매화를 좋아한다. 해마다 매실을 담가 3여년 묵혀두는 매실액도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상비약이자 식재료이다. 가끔은 꽃을 따서 차로 다려 마시기도 한다. 퇴계 이황선생은 “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않는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으셨다. 어려운 일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개결한 성품이 그려진다. 매화를 남달리 좋아하셔서 107수의 매화시를 지으셨다고 하니 그분의 매화사랑은 각별하셨다.

    아파트 뜰에 동지 무렵부터 이월 초순까지 눈떠 있는 동지매를 벗하는 기쁨이 겨우내 쏠쏠하다. 하얀 눈이 내린 듯 피어 기품을 뽐내는 매화를 보는 것이 겨울나기의 진정한 호사스러움이 아닐까!

    산청 3매! 산청에 세 그루의 유명한 고매(古梅)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론 고향가는 길이면 꼭 찾곤 한다.

    전국에서 아름다운 마을로 뽑힌 남사 예담촌 마을초입 도로변에 있는 원정공 하즙 고택의 홍매는 집안의 조상이셔서 더 뜻깊고 감회가 남다르다. 600여년을 지나오는 사이 원래 나무는 수명을 다하고 모계목의 곁가지가 우람히 자라 그 자태를 이어받고 있다. 나무 아래 하즙 공의 시도 새겨져 있어 반가움을 더해준다. 텃밭에는 영의정을 지낸 손자 하연이 감나무를 심어 부모님께 감을 따 드렸다는 600여년 된 감나무가 아직도 감을 수확하고 있어 효도의 미덕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청계쪽으로 조금 더 지나 운리에 있는 옛 단속사지의 정당매를 만난다. 정당이란 벼슬을 지낸 강회백이 심어 600여년이 지난 원목은 수명을 다하고 후계목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의연히 서 있는 단속사의 동탑과 서탑 사이를 걸으며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라진 것에 대한, 영원한 것은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다시 느끼는 시간이라서인가. 입구의 작은 시비(詩碑)에 매실이 열매 맺을 때, 서산대사를 찾아온 남명 선생이 주고받은 시도 한 수 적혀 있어 선인들의 정한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으로 남명 조식 선생이 심으신 500여년이 된 남명매는 산천재가 품고 있다. 유일하게 원래 매화나무가 생생하게 자라고 있다. 고매가 주는 기품! 수형이 잘 잡혀 있어 아름답다. 따스히 품어주는 옛집같이, 나무 아래 남명 선생님의 매화 시도 찾아 읽으며 여유를 선물해주는 오래된 친구 매화가 반갑다.

    매화를 따라가며 마음길을 밝혀주는 평온함과 넉넉함, 세상은 어수선 해도 변함없이 청량한 그 기운으로 생기를 얻는 환한 날! 이 봄에는 김해건설공고의 와룡매를 만나러 가야겠다. 화엄사의 홍매와 통도사 자장매, 선암사 매화도 떠오른다. 매화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삶을 되돌아보는 정갈한 행복이 기다려진다.

    하순희(시조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