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작가칼럼] ‘의지’라는 이름으로- 이철웅(시인)

  • 기사입력 : 2022-12-29 19:20:32
  •   

  •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개인적으로 힘든 2022년을 보내서 떠오른 문장이다. 나만의 나무 속에 갇히느니 비교적 더 넓은 세상에 눈을 돌려보기로 했다. 일단 세상의 창인 뉴스를 튼다. 아뿔싸, 첫 소식부터 숨이 턱 막힌다. 외신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장르를 바꿔 보기로 한다. ‘넷플릭스’에서 핫 하다는 외국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이럴 수가! 바다가 몇십 년 후면 어족자원이 고갈될 거라고 한다. 세상에……. 내 앞길이 깜깜해서 다른 곳에 눈을 돌렸더니 세상은 그냥 깜깜한 오밤중이었다.

    이렇게 밤이 계속되다간, 보이지도 않는 돌부리에 넘어져 모든 게 끝날 것만 같다.

    돌부리들은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때론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못 이긴 척 넘어져 주기도 하고, 어쩔 땐 악화된 건강이나 평범한 생각과 괴리된 사람의 얼굴로 집 밖을 나서지도 못하는 내가 되기도 했다.

    안전해야 할 곳들은 그렇지 못한 곳으로 단번에 이중성을 들어내곤 했다. 기댈 수 있는 기둥과 비빌 언덕은, 안락함을 느끼는 순간 곁에서 멀어져 간다. 그렇기에 늘 희망이든 절망이든 나의 모난 마음을 잡아 휘둘러주길 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근거 없는 기대를 해보고 또 이유 없는 실망도 해본다. 누군가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묻는다고 해도, 모든 걸 대답할 순 없었다.

    그런데도 수많은 선현의 말에 따르면, 내가 고통으로 빚어진 삶 속에 꿈틀거리는 이 순간도 흔히 말하는 옛날보단 깔끔히 정리된 사치스러운 순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단순히 ‘욕심’ 덩어리에서 오는 ‘환상통’ 같은 것이라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그 게 사실이라면 좀 더 속 편하게 망가질 수 있을 것 같아 안심될 정도다. 그러나 그 안심조차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란 걸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지금, 현재의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갈망으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마치 배냇짓 하는 아기를 다루듯 나를 손쉽게 제압해 왔다. 하지만 그 불안도 계속되진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내 안에는 꾸준히 ‘발전’하는 작은 회로 같은 게 있었다. 절망과 희망을 오갈 때도 기다리고 기다려 ‘의지’라는 이름으로 눈앞에 번쩍이며 나타났다.

    믿을 건 ‘의지’ 밖에 없다.

    ‘내가 오른 것은 산이 아니다. 삶이란 에베레스트였다.’ 존경해 마지않는 산악인 박정헌 대장의 말이다. 어쩌면 이 시대에 웬만해선 잘 팔리지 않는 문학이란 길을 걷고 있어서 스스로 힘겨웠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잘 팔리는 것보다 자주 찾아지고 싶다는 방향으로 의지를 다져본다.

    새해가 와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또 같은 지점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방황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미 오를 산의 들머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하려 한다. 적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산을 찾지 못하거나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산악인들처럼 올랐던 산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새해는 언제나 미지의 세계다. 같은 계절이 돌아오더라도, 여전히 같을 리 없고, 어제의 바람을 오늘로 담아올 수 없단 것도 이젠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낯설지만 새로운 날을 만나러 갈 생각에, 가슴이 뛰어온다.

    이철웅(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