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사람속으로] 설진환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잊히지 않는 부마 위해 ‘생활 속 부마’ 만듭니다”
작곡가·지휘자· 음악교사 지낸 음악인
부모님 반대에도 음악 꿈 못버려 공부

  • 기사입력 : 2022-12-14 20:27:20
  •   
  • 민주주의(民主主義).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 경남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소중한 역사가 있다. 그중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진 ‘부마민주항쟁’은 유신 독재 체제를 막을 내리게 한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권력을 가지고 행사하는 시민들에게는 부마민주항쟁이 잊혀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 일상 속의 ‘부마’를 목표로 문화적으로 민주주의 가치를 전하려는 이가 있다. 바로 음악인 출신 설진환(64)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이다.

    설진환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이 지난 8일 창원시 신월동 한 카페에서 부마민주항쟁과 관련한 옛 기억을 말하고 있다.
    설진환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이 지난 8일 창원시 신월동 한 카페에서 부마민주항쟁과 관련한 옛 기억을 말하고 있다.

    설진환 회장은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사를 지낸 음악인 출신이다. 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머니께서 음악을 가르치고 피아노를 치니 자연스럽게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런 관심은 설 회장에게 이어져 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배우는 계기도 됐다. 하지만 음악을 하기 시작하니 성적은 자연스레 떨어졌고 부모님은 화를 내며 음악을 하지 말라고 야단쳤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한다. 설 회장은 음악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가 몰래 혼자 공부하며 진해군항제 전국 학생음악경연대회 작곡 부문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상을 받고 부모님과 중국집에서 조촐한 축하 파티를 했어요. 그래도 음악은 취미로만 하고 직업으로는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자식 이기는 부모 있나요. 고3 때 음대에 가야 하니 어머니께서 아버지 몰래 저를 음악학과 대학교수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셨죠. 아버지께 들킬까 겁나 작곡서 위에 교과서를 올려두고 몰래 공부한 기억이 나네요.”

    노력 끝에 그는 창원대 음악과 1회 생으로 입학했다. 음악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지만, 그해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한다. 그는 다행히 고문받거나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항쟁 이후 시위 주동자로 몰려 한동안 숨어 지냈다고 한다.

    “당시 마산뿐만 아니라 경남지역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부마민주항쟁에 뜻을 같이하고 민주화를 바라는 의식을 다 갖고 있었어요. 제가 기념사업회 회장이라고 뭐 특별히 크게 한 일이 있거나 한 거는 아닙니다. 저 그리 대단한 사람 아닙니다.”

    대학 생활 내내 그는 합창단을 지휘하고 작곡에도 매진했지만, 졸업할 때는 취업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마산 의신여자중학교에 음악 교사로 일하게 된다.

    자신과는 맞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교사 생활에 점차 적응한 그는 당시만 해도 학생들이 접하기 힘들었던 문화 활동을 할 수 있게끔 노력했다. 매해 악기를 사 모았고, 오케스트라도 직접 만들었다. 그는 “유럽에는 1인 1악기 하는 나라들 많다. 어려운 때지만 이런 경험을 학생들에게 꼭 만들어주고 싶었다”며 “학생들에게 연 3회 정도 연주회, 전시회 등 문화행사 참여를 권장했다. 학생들은 공연 체험을 함께하는 친구 모임이 생겨나고, 정기적인 계획을 세워 문화행사에 동참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2011년 의신여중 음악교사로 재직 중이던 설진환 회장이 피아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경남신문 DB/
    지난 2011년 의신여중 음악교사로 재직 중이던 설진환 회장이 피아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경남신문 DB/

    이후 그는 음악을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학교를 휴직하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다. 2년 넘게 유럽 전역을 돌며 공부한 뒤 그는 본인 능력으로는 이 길은 힘들겠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학교로 복직한다.

    교편을 다시 잡은 그는 교사 생활에 충실하며 작곡 활동도 꾸준히 했다. 그는 작곡으로 민주주의를 말했다. 2009년에는 3·15의거 기념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설 회장은 3·15의거를 ‘가슴속 영원히 타올라야 할 횃불’이라고 강조했다. 설 회장이 민주주의와 관련된 작곡을 하게 된 개인적인 계기는 외숙부인 김태홍 시인 영향이 컸다. 김 시인은 김주열 열사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시 ‘마산은’을 써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폈다. 첫 작곡 발표회에 김 시인이 직접 찾아 시집을 참석자들에게 나눠 주며 ‘진환이가 내 조카’라고 말하며 자랑스러워했다고도 한다. 이외에도 교사 재직 시절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원 자격으로 부마민주항쟁 30주년 기념 현악 4중주 곡 ‘염’을 작곡하기도 했다.

    교사 퇴직 후에 그는 작곡 활동과 기념사업회 일에 열중한다. 2014년에는 부회장을 맡았고 2020년도부터는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잊힌 부마를 함께하는 부마, 생활 속의 부마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이를 위해선 문화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30년사를 정리해서 출간하고 시집도 만들고 수기 공모전을 했다”고 설명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30년사 책을 보여주고 있는 설 회장./경남신문 DB/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30년사 책을 보여주고 있는 설 회장./경남신문 DB/

    설 회장은 앞으로 부마민주항쟁 참가자들을 위한 트라우마 센터 건립에 노력할 생각이다. 정부가 공식 인정한 항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한명이다. 죽음의 아픔도 큰 만큼 살아있는 이들의 아픔도 크다. 그는 죽은 사람이 몇 명인가 하는 문제보다 살아 있는 이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살아있는 사람들 트라우마는 평생 갑니다. 고문으로 인해 자기 삶이 완전히 바뀐 거예요. 하지만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들을 치료해줄 트라우마 센터와 제도적 장치가 꼭 필요합니다.”

    그는 항쟁 정신을 지키며 민주단체들이 활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보면 ‘민주’라는 단어를 아무 곳이나 많이 쓰는데 제대로 그 뜻, 정체성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민주라는 단어를 쓰면 항상 그 옆에 시민들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민주단체들은 부마의 정신적 가치와 민주주의 정체성이 왜곡되지 않게 전달하고 지켜야 합니다. 앞으로 기념사업회가 정체성을 올곧게 지키면서 시민들에게 조용히 생활 속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설진환 회장은 창원대학교 음악과와 영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했으며, 3·15 뮤직컴퍼니오케스트라 지휘자, 경남교원필하모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경남작곡가협회 부회장,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글·사진=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박준혁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