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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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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956) 강학불권(講學不倦)

- 학문을 강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 기사입력 : 2022-11-22 08: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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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방한학연구원장

    1993년 2월 취임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취임한 지 오래지 않아 여러 분야의 원로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듣고 정치개혁에 반영하려고 했다.

    어느 날 한문학계(漢文學界)의 원로인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선생을 초청하기 위해 비서가 전화를 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벽사는 “가겠습니다”라고 응낙을 했다. 잠깐 있다가 “날짜는?”이라고 물었다. “5월 첫째 수요일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럼 안 되겠습니다. 중요한 일이 미리 잡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들은 조교가 “5월 첫째 수요일은 선생님께서 강독수업 안 하시겠구나”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첫째 수요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 주에는 강독 못 한다”라는 말이 끝내 없었다. 5월 첫째 수요일이 되자 벽사는 강독수업을 그대로 했다. 청와대에 전달한 ‘미리 잡혀 있는 중요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 연구소에서 강독하는 일이었다.

    이때 벽사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하고 서울에 실시학사(實是學舍)라는 개인 연구소를 열어 매주 두 번씩 강독을 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간행해 내고 있었다. 물론 강의료는 받지 않았다. 대학의 정규적인 강의도 아니고 개인 연구실에서 하는 강의를 대통령의 초청에도 응하지 않으면서 지켜나갔다.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김성혁(金成赫) 교수는 달력에 정식 공휴일로 정해진 날이 아니면 어떤 일이 있어도 강의를 했다. 대학에서 흔히 축제, 체육대회 등등해서 의례적으로 강의를 안 하는데 이분은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학생이 한 명도 안 와도 진도를 나갔다. 다음 시간에 학생이 “진도 거기까지 안 갔습니다”라고 하면 “지난 주에 다 했어”라고 대답했다.

    자기 집에서도 거의 무료로 일요일만 빼고 매일 2시간씩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영어 강의를 했다. 학비로 학원의 5분의 1은 받았는데 이것도 개인적으로는 한 푼도 안 쓰고 모두 자선사업에 썼다.

    관청에서 표창하려고 하거나 방송국 신문사 등에서 취재하러 오면 “상 받거나 이름 내려고 강의하는 것 아닙니다”라고 절대 응하지 않았다.

    모르는 곳이 나오면 “다음에 알려드리겠습니다”하고는 미국문화원, 대사관, 심지어 미국 본토 대학의 교수 등에게 전화를 해서 반드시 알려주었다.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낸 조순(趙淳) 박사는 워낙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분이라 강의를 많이 빠지겠지라고 선입견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단 한 시간도 빠진 적이 없다고 한다. 강의를 최우선으로 했다. 혹 정해진 시간에 할 수 없을 경우에는 반드시 보강을 했다.

    자신이 하는 강의를 자신이 제일 중시해야 듣는 사람들도 그 강의를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교수 자신이 걸핏하면 강의를 빼먹으면 듣는 사람들이 그 강의를 소중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 講 : 익힐 강. * 學 : 배울 학.

    * 不 : 아니 불(부).

    * 倦 : 게으를 권.

    동방한학연구원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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