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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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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괜찮다는 말과 공감에 대한 단상- 황진혁(작가)

  • 기사입력 : 2022-11-17 19: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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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생기는 감정이 있다. 책에서 만나는 ‘괜찮아’라는 말이 한 번씩은 불편하게 다가온다. 서점에만 가도 너무 많은 책에서 ‘괜찮아’라는 말이 난무한다. 저자가 독자의 현재를 괜찮은 상황인지 안 괜찮은 상황인지 일일이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 대고 ‘괜찮아’라는 무책임한 위로를 보태는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인지를 잘 모르겠다.

    사람의 삶에는 때에 따라 스스로도 감당키 어려운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결과적으로는 끝내 받아들이거나 감당할 수 있더라도 당장에는 정신적인 충격을 안은 채로 판단이 어려워지는 일이 닥치기도 한다. 이 같은 일들이 있을지도 모를 이들 앞에서 일면식도 없는 저자의 ‘괜찮아’라는 말은 정말 타인을 괜찮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일반적으로 저질러진 일은 해결하지 않으면 괜찮아지지 않는 게 맞다. 예컨대 몸에 병이 생길 때도 그렇다. 자연적 치유가 가능한 병도 있지만 대개 병이 생기면 의학적인 치유를 받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가는 악화되기 십상이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벌어진 일을 그대로 두어버리면 강물이 방향을 따라 흐르는 것과 같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는 흐름대로 떠내려가게 되는 법이다. 누군가에게로부터 듣는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말이 상황까지 괜찮게 만들진 않는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잘 안되어도 괜찮은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무턱대고 괜찮다는 말은 같이 방법을 찾아주거나 같이 슬퍼하는 일만 못하다.

    괜찮아라는 말과 함께 불편한 말이 있다면 ‘공감해주다’라는 말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상한 말’ 같다. ‘공감하다’라거나 ‘공감되다’도 아니고 ‘공감해주다’라는 게, 어감에서부터 매끄럽지 못해서다. 누군가의 말을 공감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게 아니라, ‘해주다’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억지스러움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그냥 들어주고 말면 되었지, 공감 가지 않는 말을 억지로 공감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힘든 일이고 상대방에게도 얼마나 가식적인 일이겠는가. 그런 모습이 상대방을 향한 존중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책을 통해 ‘공감해주다’라는 식의 글귀를 읽을 때마다 생각해본다. 우리에게는 대체 얼마나 공감신경세포가 부족하기에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이런 인위적인 행동이 필요한 것일까를.

    우리가 진실을 그대로 마주하면 좋겠다. 밑도 끝도 없이 ‘괜찮아’라는 말에 젖어들어 마약처럼 위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피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일 앞에서 씩씩해지면 좋겠다. 회피한다고 문제가 작아지지 않을 문제들도 거꾸로 말하면 그것을 마주한다고 아주 커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보내는 이왕의 존중과 긍정이 진실되었으면 좋겠다. 그늘진 이에게 가볍고 서늘한 공감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다 따뜻하고 든든해지는 공감이 오가면 좋겠다. 공감인지 동정인지 때로 관심이 있긴 한 건지 모를 만큼 무분별한 무언가가 세상 여기저기 둥둥 떠다니는 것보다는 속이 꽉 찬 어떤 공감 하나가 다가왔을 때, 우리는 스스로와 서로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황진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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