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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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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숙맥(菽麥)의 난(亂)- 박재희(석천학당 원장)

  • 기사입력 : 2022-10-06 2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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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숙맥(菽麥)이라고 한다. 숙(菽)은 콩이고, 맥(麥)은 보리다. 크기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확연히 다른 곡식인데, 눈으로 직접 보고도 분별하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렇게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쑥맥!’이라고 욕하기도 한다. 숙맥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콩과 보리뿐이겠는가? 상식과 비정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과 평상 어를 구별하지 못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해를 보고 달이라 하고, 달을 보고 해라고 하면, 낮과 밤이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진시황제가 죽고 2세인 호해(胡亥)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곁에는 환관인 조고(趙高)가 있었다. 간신 조고는 진시황제의 가장 우둔한 아들 호해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신하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사슴(鹿)을 호해에게 바치며 말(馬)이라고 했다. 호해가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가?”라고 하자, 조고는 신하들에게 물어보자고 했다. 신하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침묵파였다.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잘못 말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을 선택한 부류였다. 또 한 부류는 ‘사슴파’였다. 분명 말이 아니었기에 목숨을 걸고 사슴이라고 정직하게 대답한 신하들이었다. 마지막 한 부류는 ‘숙맥파’였다.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슴이라고 하는 순간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슴과 말도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숙맥들만 남고 모든 신하는 죽임을 당했다. 바야흐로 숙맥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숙맥의 시대는 채 몇 년도 가지 못했다. 더는 숙맥으로 살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봉기해 결국 진나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됐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에 전하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나온 배경이다.

    이성이 침묵하고, 거짓이 참이 되고, 변명이 사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를 숙맥의 시대라 하고, 이런 시대를 숙맥의 난(亂)이라고 정의한다. 숙맥의 난맥상은 그 어떤 혼란의 시대보다 폐해가 크다. 상식은 몰락하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도술(道術)이 성행한다. 이런 도술을 부리며 세상 사람들을 홀리는 도사들이 숙맥의 시대에는 주류가 된다. 혹세무민(惑世誣民)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의 주머니를 터는 일이 능력으로 인정된다. 숙맥교 교주들은 분별력을 잃은 숙맥들을 이끌고 허무맹랑(虛無孟浪)한 말로 사람들을 부추겨 그들의 잇속을 챙긴다. 이미 좀비가 된 숙맥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교주들의 구호에 맞춰 절규하고 거품을 물고 욕을 해 댄다. 이념이 사람을 잡아먹고, 관념이 현실을 가린 숙맥의 난이 펼쳐지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늘 숙맥의 난(亂)으로 들끓었다. 서양에는 르네상스가 동양에는 성리학이 이성(理性)을 기치로 숙맥의 난을 평정하려 했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혀 좌절됐다. 진실은 호모사피엔스에게는 너무 과분한 이상이었기 때문일까?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숙맥의 난에 절정에 이르고 있다. 숙(菽)과 맥(麥)을 분별해야 할 언론과 권력기관은 숙맥의 시대에 기름을 부으며 부추기고 있고, 각종 권력은 그 위에서 마음껏 난세를 즐기고 있다. 콩과 보리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의 세상을 침묵파로 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박재희(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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