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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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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우유와 초고추장- 황선영(의령교육지원청 장학사)

  • 기사입력 : 2022-10-05 19: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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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르막 사거리에서 신호가 언제 바뀔지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이 서툴러 노심초사 앞만 바라보는 사이 뒤 차가 빵빵거린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당황하는 사이 그 차가 옆으로 와서 창문을 내린다.

    복잡한 심경으로 나도 창문을 내린다. “선생님! 저예요!” 활짝 웃으며 바라보는 운전자는 그 옛날 나의 제자였다. 배달 화물로 꽉 찬 트럭을 세우고 우유를 한 상자나 내려주고 간다. 수업 시간이면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교탁 바로 앞자리에 앉아 예쁘지도 않은 내 얼굴을 계속 쳐다보고 싱글거리기만 하던 녀석이었다. 나중에 어떻게 살려고 공부도 안하고 그러냐며 혼을 내었었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함박 웃음만 짓다 제자를 보낸다.

    마트에서 저녁 장을 본다. 오늘은 홍어에 막걸리가 당기는 참이다. 생각보다 홍어가 비싸다. 어떤 부위를 고를지 쉬 결정하지 못하고 가격 비교만 하고 있다. “선생님! 저예요! 홍어 사시게요?” 낯이 익은 목소리에 눈썹 짙은 웬 아저씨가 걸어 나온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10년은 족히 넘은 옛 제자다. “어, 너 여기서 일하는 거야?” 수산물 코너 팀장이라 한다. 선생님에게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드릴 수 있다며 초고추장 팩을 한 주먹 쥐어 내 카트에 넣어준다. 족히 스무 개는 넘는다. 이런, 한동안 홍어 먹을 초고추장은 안 사도 되겠구나!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공부는 접어뒀던 녀석이었다. 스승의 날에 나랑 닮았다고 피카츄 인형을 선물했었다. 어디가 닮은 거냐며 삐친 척과 함께 인형 뽑기 같은 거 하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혼을 내었더랬다. 장보기에 분주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잠시 정지한다. 하얀 셰프 모자를 쓰고 생선 손질에 바쁜 녀석의 듬직한 어깨 위에 뿌듯한 미소를 얹는다.

    오늘도 어디선가 불쑥 “선생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시 녀석들과의 시간을 한참 추억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작지만 빛나는 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고 있을 나의 제자들. 오늘도 녀석들과의 시간은 순도 100퍼센트로 발효돼 어떤 막걸리보다 더 나의 볼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황선영(의령교육지원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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