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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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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동반자- 김시탁(시인)

  • 기사입력 : 2022-09-14 19: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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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을 넘어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아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 준다고 거품 물고 큰소리치며 참기름을 바른 듯 매끄러운 말로 옆구리 쿡쿡 찌르며 같이 살자던 그때의 모습이 남아 있나요. 아니면 세월의 풍화와 침식에 짓눌려 옥수수 수염처럼 가늘어진 머리칼이 가을날 갈대 이파리처럼 희끗희끗해져 있나요.

    보는 눈도 세월을 비켜가지 못할 테니 희미하게 보이거든 가자미 눈을 만들어서라도 한 번 자세히 보십시오. 한때 콩깍지가 눈에 씌어 생을 이자도 없이 통째로 맡겨버린 사람이 아닌가요. 그 사람이 종아리 시퍼런 세월을 그대와 함께 살아왔습니다. 한평생 가장의 짐을 지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허리도 굽고 관절도 시린 늙은이가 되어갑니다.

    정년을 넘기니 딱히 정해진 일도 없는 데 무작정 나다니는 것도 돈이 들기에 질기기만 한 세월을 날 것으로 물어 뜯느라 이젠 이빨도 잇몸도 다 망가졌습니다. 누가 불러주는 사람은 없어도 갈 곳은 많던 세월도 노루 꼬리 같더니 하루를 간이 맞게 비벼 먹고 편안히 잠자리에 드는 일도 버겁습니다. 골다공증에 갱년기에 건망증까지 겹친 아내에게 삼식이로 살자니 염치도 없는데 하는 일 없이도 배꼽시계는 쉬지 않고 돌아가서 때가 되면 민망한 소리를 내니 참 난감할 따름입니다. 유유자적 품위 유지에 경제적 가치까지 겸한 일자리를 찾는 것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일만큼 위대하고 힘든 일이니 유유자적 품위 유지는 접고 끼니라도 해결하고 교통비라도 챙길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으니 마음만 분주할 뿐 가슴속으로는 담벼락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연금이라도 넉넉하면 좋겠는데 그마저 전립선이 탈 난 오줌 줄기 같으면 예삿일이 아니지요. 평생을 직장 다니며 가족들을 부양했으나 막상 퇴직하고 용돈 타 쓰는 신세가 되면 절로 기가 죽고 고개가 숙여지니 남자들의 비애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아내들이여, 그대 옆에 있는 남자를 좀 살갑게 대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하는 일이 어리숙해도 양말 속을 뒤집은 채 벗어 놓아도 음식을 좀 흘려도 술 한 잔 하고 들어온 날은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해도 너무 핀잔 주지 마세요. 아버지 제삿날도 잊을 때가 있는데 결혼기념일 좀 잊으면 어떻고 파마한 머리 좀 몰라주면 어떻습니까. 이젠 남성 호르몬도 감소하니 성욕도 의욕도 기력도 쇠진해져 곁눈질로 보는 막장 드라마도 눈시울이 젖고 나훈아 노래 한 구절에도 왈칵 눈물이 쏟아진답니다. 나이 들면서 자주 듣게 되는 말들이 이젠 좀 바꿔, 이젠 좀 그만해, 아직도 그래, 그게 어디 가나, 이런 말인데 그것보다는 잘했어, 당신이니까 했지, 당신이 옳아, 하는 이런 말들이 보약 한 첩보다 더 힘이 된다는 걸 이 지구상에서 높은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그대들은 아실 테지요.

    ‘당신이 최고야!’ 이런 당신의 말 한마디만 들으면 그날 온종일 입이 귀에 걸려 원수를 만나도 밥을 사줄 수 있고 남이 발을 밟아도 아름답게 웃어줄 만큼 목매달고 죽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많은데 그대의 옆 사람도 그쪽 지방 사람인 거 알고는 계시는지요. 모르셨다면 지금부터 그렇다고 보시면 되니 그 말 한마디 하신 날은 어디 실컷 놀다 들어오셔도 개 밥 주고 청소기 돌려놓고 늘어놓은 빨래까지 거둬들인 채 착하게 기다리는 낯선 남자 하나가 있을 테니 놀랍더라도 대놓고 이마는 짚어보지 마세요. 그 남자가 바퀴벌레를 잡고 쌀 가마니를 옮겨주며 그대의 손이 닿지 않은 등줄기를 시원하게 긁어주고 겨울 화분을 봄날 밖으로 내놓고 그 강을 건널 때까지 눈부신 햇살을 함께 맞을 당신의 동반자입니다. 평생을 살아온 기질로 변화에 더디더라도 바꿀 생각보다는 인정하고 의지하면 여생이 훨씬 편안하지 않을까요. 병들어 누웠거나 옆자리가 아주 비어 있는 것에 비하겠습니까.

    중년을 넘어서 노년의 문지방을 밟거나 넘어선 아내들에게 고합니다. 세상의 무거운 건 다 들어 놓고 왜 정작 철은 들지 않느냐고 다그치지 마십시오. 철이 들었으니 기도 죽고 눈물도 나는 겁니다. 철이 야물게도 들었기에 고개가 자꾸 그대 쪽으로 굽는 겁니다.

    김시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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