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9일 (금)
전체메뉴

[성산칼럼] 잘 쉰다는 것에 대하여- 김일태(시인·통영국제음악재단 이사)

  • 기사입력 : 2022-07-13 20:34:18
  •   

  •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후배가 지난달 말 정년퇴직을 했다. 그는 30여년간 창원시립예술단의 공연기획과 사무 행정을 담당하며 무대조명 바깥의 전문영역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온, 우리 지역 클래식 음악계 발전의 중심에 있었던 음악인이다.

    필자와는 통영국제음악제의 태동기 때 함께 행사를 공모한 동지이기도 하다. 최근 식사 자리에서 그에게 퇴직 이후 뭐하냐고 물었더니 ‘그냥 잘 쉬고 있다’라고 했다. 그런 그에게서 나의 정년퇴직 이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무조건 아무 생각 없이 쉬어보자. 이것이 나의 퇴직 이후 첫 번째 목표였다. 자신의 전문성을 이어가는 일에는 기회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전혀 경험 없는 일은 부담스러운 일이어서 어쩌면 이런 판단은 나와 후배처럼 오랫동안 전문 직종에 일해온 사람들이 공통으로 겪는 고충일 것이다.

    우리 삶의 여정에 있어서 일과 일 사이에서 ‘잘 쉰다’라는 것은 다음을 위해 일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음악계에서는 ‘쉼표도 악보다’라는 말이 일반화돼 있다.

    다른 여러 예술 영역에서도 이 ‘쉼’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노래를 부를 때나 악기를 연주할 때 얼마나 멋있게 잘하느냐의 관건은 호흡이다. 숨을 쉬어야 할 때 쉬고 악기 연주를 멈추어야 할 때 얼마나 기술적으로 잘 멈추어 쉬느냐에 따라 기량의 평가가 좌우된다. 이는 문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와 시조에서 행을 짓고 연을 짓는 핵심 기술도 바로 호흡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 호흡에 해당하는 행과 두 호흡에 해당하는 연 사이에 숨바꼭질하듯이 작가는 깊이 작품의 의도를 숨기고, 독자는 이를 발견하면서 더 큰 감응과 쾌감을 느낀다. 방송이나 연극 등 말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모든 영역의 대본 역시 문장 구성과 발성을 구분 짓는 원칙은 이 호흡에 기반한다. 이 모두가 잘 쉬며 호흡한 뒤 내는 첫소리와 첫 어휘에 힘과 깊은 감성이 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잘 쉰다’라는 것은 예술의 기량에서 그렇듯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유행했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문구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몸의 안식과 마음의 평화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상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에 아무런 마음의 부담이 없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마음의 평정을 위해 성직자들이 스스로 온몸을 혹사하는 고행의 길을 택하겠는가. 생의 전환기에 잘 쉬지 못하는 까닭은 어쩌면 준비가 부족한 노후 대책과 일을 놓고 쉼만을 선택하기에는 아직 건강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얼마 전 한 30대 이상 직장인 879명을 대상으로 정년퇴직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10명 중 8명은 은퇴 후 재취업을 희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이유는 47%가 노후 준비 부족을 꼽았고 34%가 안정적인 수입원이 필요해서라고 답했다. 그 외에도 건강 유지와 자아실현을 위해서가 각각 20%였다. 결국 쉼을 선택하고 싶어도 제대로 쉴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당분간 쉼을 선택한 후배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생의 전환기를 거치며 그도 이젠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늙음을 깨달으면서 어엿한 어른으로 살아갈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약해져 가는 것이다. 갈수록 소외되고 가치 또한 차츰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리를 낮추고 물러설 때 그 약함은 겸손이 되고 지혜가 된다. 그의 오래 누적해온 전문지식은 잘 발효해 곰삭은 음식처럼 생의 맛을 깊게 하는 지혜로 승화될 것이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이라고 심경을 표현한 어느 노시인의 시구처럼 그는 잘 쉬는 시간을 거쳐 새로운 생에 도전하고 즐기는 시간으로 접어들게 될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가 ‘잘 쉼’을 통해 다시 힘차고 감성 깊게 펼칠 인생 2막 공연에 큰 기대를 건다.

    김일태(시인·통영국제음악재단 이사)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