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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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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섬머타임’이란 노래를 좋아하세요?- 장석주(시인)

  • 기사입력 : 2022-06-09 20: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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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섬머타임(Summer time)’이란 노래 때문이다.

    ‘여름이란다. 그리고 삶은 평온하지./ 물고기는 뛰어오르고 목화는 잘 자랐다네./ 오, 아빠는 부자고 엄마는 미인이란다./ 그러니 쉿, 아가야, 울지 마렴./ 이런 아침이 계속 되면 넌 다 커서 노래하겠지./ 넌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 거야./ 하지만 그때까지 아무것도 널 해치지 못할 거야./ 엄마 아빠가 네 곁에 있으니’.(조지 거슈인, 1919) 여름이 올 무렵 이 노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노래에 담긴 아련하고 슬픈 노스탤지어 때문에 인생의 웬만한 고달픔도 참을 만하다. 내겐 부자 아빠도, 미인 엄마도 없는데, ‘섬머타임’이 흘러나오면 심장이 함부로 나댄다.

    어린 시절 여름의 이른 아침, 하늘은 맑고 부지런한 외할머니가 비질한 마당은 깨끗하다. 수련 꽃대가 올라오고 참새들은 짹짹거린다. 막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켤 때 뒷산에 올라 참나무 진액에 달라붙은 딱정벌레나 풍뎅이를 잡을 생각에 소년의 기분은 붕 뜬다. 먼 데서 수꿩이 울고, 하늘엔 흰 구름이 떠간다. 소년은 수줍음이 많았지만 숲에서는 용맹스러웠다. 아무 시름이나 걱정 없이 여름 숲을 어린 짐승처럼 땀 흘리며 뛰어다닌 소년의 작은 머리통에서는 풀 냄새가 진동했다.

    가난했지만 가난이 뭔지를 몰랐다. 자주 배가 고팠지만 가난에 주눅 들지 않았다. 왜 맨드라미는 피었다가 지고, 돼지는 왜 해마다 열 마리나 되는 새끼를 낳는 지를, 계절이 바뀔 무렵 장롱에서 꺼낸 옷에는 왜 단추가 하나둘 씩 떨어졌는지를, 맹꽁이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비올 때만 나타나서 우는 지를, 소년은 몰랐다. 땅거죽을 밀고 올라오는 작약 움이나 느릅나무에 돋는 연초록 잎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아름다움이 뭔지도 모른 채 이 세상에는 온갖 아름다움이 흘러넘친다고 생각했다.

    마을 언덕 바지엔 교회당이 있었지만 소년은 교회를 가 본 적이 없다. 소년은 여름 숲을 누비는 놀이의 천재일 뿐,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지를 몰랐다. 소년은 유황냄새를 맡거나 기차를 타본 적도 없었다. 소년은 제가 열여덟 살이 되고, 서른이 되고 쉰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물론 모르는 게 그것 뿐 만은 아니었다. “왜 죽음은 내 존재를 가득 채우며 고동치고 / 내 일생을 몇 초(秒)의 날갯짓에 묶어 두는가?”(아도니스) 그리고 눈(눈)과 태풍, 지구와 붉은 달, 살인과 단두대, 풋사랑의 서글픔이나 피맛 나는 그리움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바가 없었다.

    눈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꽃들이 피고, 어딘가에 탑이 올라가며,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새로 태어난다. 슬픈 일도 많지만 세상은 살 만하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지 부모와 떨어져 자란 탓인지 어린 게 눈치가 빤하고 조숙해 소년은 머리 맡에서 어른들이 수군대는 얘기를 들었다. 어른들의 얘기를 더 들으려고 했지만 소년은 어느덧 잠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움은 덧없는 슬픔 속에서 반짝이며 온다는 걸 눈치 챈 소년은 정말 조숙했을까? 그 소년은 오뉴월 보리처럼 자라나고, 성상(聖像) 같은 어린 시절은 참 빨리도 지나갔다.

    여름이 온다. 여름의 신들이 태양을 데려다가 노동을 시킨다. 태양의 중노동 덕택에 들에서는 농작물이 자라고 익어간다. 세상을 뜬 사람과 새로 태어나는 사람 사이에서 복숭아나무 가지에 매달린 복숭아가 무르익고, 채마 밭을 뒤덮은 녹색 줄기에 달린 둥근 수박에 단맛이 배어든다.

    여름의 신들이 가만히 속삭인다. 이 여름은 단 한번 뿐이야. 여름의 행복도 두 번은 없어. 자, 이 여름의 향연을 맘껏 즐겨라! 나는 숱한 인연과 그리움을 겪으며 떠돌이별 같이 방황했다. 내 손목을 채웠던 시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랑의 설레임과 환멸, 우연한 행운에 숨은 악의, 늙음과 병에 대해, 이제 나는 알 만큼 안다. 나이가 들며 얼굴도 취향도 달라지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영혼의 깊은 곳을 두드리는 ‘섬머타임’을 여전히 좋아하고, 덧없는 슬픔의 영역에 속한 아름다움에 속절 없이 매혹 당하는 것이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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