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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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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마산 출신 권오봉 선생 ‘성재일기’ 세상 밖으로

25년간 써 내려간독립 염원의 발자취

  • 기사입력 : 2022-05-25 08: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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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오봉 선생님이 쓰신 성재일기는 오래전 유실됐는데, 여전히 행방은 오리무중이에요. 우여곡절 끝에 사본을 통해서나마 들여다본 일기 속에는 경남의 독립운동사를 보완 내지는 재정립돼야 할 정도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들어있어요. 성재일기는 개인의 기록을 넘어 공동의 기억으로 공유하고, 누구나 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성재일기 내용 일부./성재일기 간행위원회/

    성재일기 표지 사본./성재일기 간행위원회/

    일제강점기 창원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의 치욕을 떨쳐내고자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고 자신의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인물이 있다. 바로 성재 권오봉(1879~1959) 선생이다. 최근 그가 25년간 써 내려간 ‘성재일기’가 사본으로나마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냈다. 성재일기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의 권오봉의 공적을 뒷받침할 근거이자 연구 가치도 지니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원본은 수십 년 전 유실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성재일기의 사본이 권오봉 선생의 후손을 거쳐 원은희 시조시인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성재일기는 권오봉이 1932년부터 1957년까지 25년 동안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바를 고스란히 기록한 일기다. 긴 세월만큼이나 총 21권으로 이뤄진 방대한 분량 안에는 날짜에 따라 그의 이동경로, 교통편, 사람들과의 교류, 그날의 사건과 상황, 날씨, 사회풍경 등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또한 안희제, 이극로, 이우식, 남형우, 신익희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과의 관계, 영남지역의 유력인사와 독립운동가들간의 인적 연대 등 당시 생생한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문필가로 정평나있던 그의 시도 수록돼 있다.

    지난달 2일 열린 '성재일기를 말하다' 토크콘서트에서 강연 중인 원은희 성재일기간행위원장/성재일기간행위원회/
    '성재일기를 말하다' 토크콘서트에서 강연 중인 원은희 성재일기 간행위원장./성재일기 간행위원회/
    지난달 2일 성재일기간행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 위치한 경행제에서 '성재일기를 말하다'를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진행했다. /원은희 시조시인/
    지난달 2일 성재일기간행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 위치한 경행제에서 '성재일기를 말하다'를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진행했다. /원은희 시조시인/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된 경행재 내 세워져 있는 성재 권오봉 선생의 공적비/원은희 시조시인/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된 경행재 내 세워져 있는 성재 권오봉 선생의 공적비./원은희 시조시인/

    원 시인은 “성재일기를 보면 권오봉 선생님은 독립운동가, 교육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등 그의 행적에 의해서 세상이 돌아간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특히 일기 초창기에는 독립운동가들과의 만남과 그들과의 협력적 관계도 살펴볼 수 있으며, 수록된 시를 통해서는 시문에도 뛰어난 학자임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유실되기 전까지 성재일기는 권오봉의 큰 아들인 권환 시인의 아내 손성남 여사가 유품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0년대 취재와 연구를 목적으로 찾아 온 이들에게 성재일기를 빌려준 이후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한 채 자취를 감췄다. 이후 성재일기를 백방으로 찾아다닌 유족들이 우여곡절 끝에 복사본이나마 겨우 손에 쥐게 된 것. 후손들은 논의를 거쳐 성재일기를 가장 애정을 갖고 바라봐 줄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지난 2021년 1월 권오봉 선생의 손자인 권채씨는 원 시인을 만나 성재일기의 사본을 전달했다. 원 시인은 올해로 19회째를 맞은 권환문학제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대변하며 문학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권환의 업적이 잊혀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또 그는 고성 출신 시조시인 서벌을 연구해 그의 문학적 성과를 재조명한 바 있다. 원 시인이 건네받은 성재일기 자료를 들여다보면 25년여 간에 걸친 권오봉의 삶이 그의 손으로 하나 하나 눌러 쓴 행초서체 한문으로 기록돼있다. 그런 까닭에 일기 내용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번역과 역주 등 후속 작업이 필요했다. 체계적인 진행을 위해 원 시인은 학자 등 10명과 함께 2021년 3월에 ‘성재일기간행위원회’를 발족해 연구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현재 번역 작업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다. 지난 4월에는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돤 경행제에서 그간 해석해 온 성재일기를 바탕으로 토크콘서트를 진행하는 등 간행위원회에서는 성재일기의 존재와 그 가치를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지난달 2일 성재일기간행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 위치한 경행제에서 ‘성재일기를 말하다’를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진행했다. /원은희 시조시인/
    지난달 2일 성재일기간행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 위치한 경행제에서 ‘성재일기를 말하다’를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진행했다. /원은희 시조시인/
    지난달 2일 성재일기간행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 위치한 경행제에서 ‘성재일기를 말하다’를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진행했다. /원은희 시조시인/
    지난달 2일 성재일기간행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 위치한 경행제에서 ‘성재일기를 말하다’를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진행했다. /원은희 시조시인/

    성재일기간행위원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원 시인은 “저희는 성재일기를 번역해 간행하는 것까지 목표로 하고 있다. 간행본이 나와야 학자들의 학문적인 접근이 용이해지면서 연구를 통해 기록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며 “이것이 음지에서 비밀리에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상들에 대한 보답이자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무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오봉
    성재 권오봉 선생

    ◆성재 권오봉 선생은

    경행학교 세운 후 인재 배출

    전 재산 독립자금으로 헌납

    성재 권오봉 선생은 1879년 11월 26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의 300석지기 중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20세가 되던 해인 1898년 그는 홀로 서울로 상경해 애국지사 양성학교였던 흥화학교에서 2년간 수학했다.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이곳에서 권오봉은 독립운동 동지들과 인연을 맺는다. 졸업 이후 그는 조선 자강 자립에 대한 전국 순회유세를 하거나 격문을 반포하면서 계몽운동에 나선다. 이때 그는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했다.

    1910년 권오봉 선생은 안동 권씨의 재실인 경행재에 경행학교를 설립해 18년간 교육자로 있으면서 아들인 권환 시인을 비롯해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이교재, 삼진만세운동의 주역인 권영조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19년에는 진전면장으로 재직하면서 삼진의거를 조직하고, 3·1만세운동 도중 다친 부상자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또한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만든 회사인 백산상회에 주주로 참여하는 등 전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헌납했다. 이로 인해 아들 권환의 약값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등 빈궁한 생활에 허덕이다 1959년 8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지난달 2일 토크콘서트 ‘성재일기를 말하다’에 참석한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성재일기간행위원회/
    지난달 2일 토크콘서트 ‘성재일기를 말하다’에 참석한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성재일기 간행위원회/

    한유진 기자 jinn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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