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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6월 25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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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3부 ⑭ 금성사와 국산 라디오 1호

[3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판매 부진’ 국산 라디오, 5·16 이후 ‘국민 필수품’으로

  • 기사입력 : 2022-05-20 08: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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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성사가 만드는 라디오의 모든 부품은 락희화학이 보유한 기술을 최대한 반영했다. 라디오 외형은 물론 작은 부품 하나까지 플라스틱 가공 경험과 사출성형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자체적으로 생산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출발했다. 당시의 회사 능력이나 국내의 기술수준을 고려할 때 라디오 자체 부품 생산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도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라디오에는 200여 가지 부품이 들어간다. 부품을 국산화하려면 그만큼 많은 금형이 필요하다. 금형 하나의 가격이 아주 고가라 초기 투자 비용도 엄청났다. 락희화학의 자본을 거의 다 쏟아부었을 정도였다.

    1961년 7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금성사 부산 연지 공장을 방문, 구인회 사장과 함께 생산된 라디오를 살펴보고 있다./LG전자/
    1961년 7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금성사 부산 연지 공장을 방문, 구인회 사장과 함께 생산된 라디오를 살펴보고 있다./LG전자/
    국내 최초로 생산된 금성사 라디오.
    국내 최초로 생산된 금성사 라디오.

    # 국산 라디오 1호의 탄생

    실패가 반복되었지만, 반복되는 실패가 줄어들수록 금성사의 기술은 향상되었다. 이런 고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59년 11월, 국산 라디오 1호가 탄생했다. 금성사 제 1호 생산품 라디오 명칭은 ‘A-501’이다. A는 AC 즉, 교류 전기를 뜻하며 501의 5는 진공관이 다섯 개, 1은 제 1호 모델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건전지를 사용하는 라디오를 개발하자고 했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어 전기로 사용하는 전기용 라디오를 개발했다. 금성 A-501 라디오는 생산된 지 50년이 지난 2013년 8월에 전자산업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을 IT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산업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559-2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A-501 라디오 정면을 보면 왼쪽 상단에 금성사 왕관 무늬가 있고, 하단에는 금성의 영문 표기인 Gold Star 회사명이 붙여져 있다.

    그 후 생산된 4호 모델인 금성라디오 A-504 제품은 스위치, 섀시, 트랜스, 소켓 등의 주요 부품을 국산화해 순수 자체 기술로 생산한 라디오이다.

    그 당시 국제신문에서 보도된 금성사 라디오 관련 주요 기사 내용이다.

    ‘1959년 11월 15일부터 금성사가 전국 상점에 일제히 라디오를 공급하였다. 금성사는 약 200명의 종업원이 현대적 시설로 된 공장에서 한달에 3000대를 만들 수 있다. 라디오는 탁상용이며 케이스는 플라스틱으로 5가지 색상을 출시하였다.’

    금성사 생산 라디오 신문광고.
    금성사 생산 라디오 신문광고.

    # 판매 부진으로 회사경영 위기

    여느 제품이든 최초 생산은 그 과정이 힘들고 어려움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라디오 생산은 했지만 생각한 만큼 판매 실적이 오르지 않자 금성사를 지원해왔던 락희화학 경영까지 영향을 끼쳤다. 연속적으로 적자가 나자 사업 중단을 요구하는 임원도 생겼다.

    당시 판매가 좋지 않은 이유는 라디오를 구입할 만큼 국민들의 경제적 여유가 있지 않았고, 전력 사정과 방송의 질이 안정적이지 못하였다. 그리고 생산체계가 없어 생산 단가를 낮추기가 어려웠다. 달리 표현해 라디오는 먹고 살기 바쁜 서민들에게는 사치품이었다.

    1959년 전자산업과 관련 있는 선풍기, 전화기, 콘센트, 플러그, 소켓과 전기 배선 기구도 생산했다. 주력상품인 라디오 판매가 되지 않아 락희화학은 창업 이래 가장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선풍기도 전기로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내는 신기한 기계였고, 여름이면 한국 사람 누구나 가정에 1대씩 구입할 거라는 상상도 부채 바람에 밀려 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구인회는 전자산업은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원은 계속할 것이니 끝까지 해보자는 결심에 변함이 없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지만 라디오 판매는 쉽게 문이 열리지 않고 2년이 지났다.

    락희화학 자본 쏟아부어 라디오 개발 심혈
    1959년 11월 ‘국산 라디오 1호’ 탄생했지만
    당시 서민들에겐 사치품으로 판매 안돼
    창업 이래 가장 큰 위기에도 끝까지 버텨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홍보 고민하자
    라디오 홍보 추천하며 농어촌 보급 동참
    밀수품 금지 정책과 더불어 폭발적 성장
    금성사 흑자 전환되며 사업확장 동력 확보

    # 1년 후 금성사 문을 닫겠다

    1961년 초 임원 회의에서 마침내 금성사를 정리하고 그 돈으로 주력기업인 화학계열에 더 투자를 하자는 의견이 계속 거론되었다.

    마지막으로 구인회는 1년의 시간만 달라고 임원에게 요청한다. 1년 후에도 변화가 없다면 내 손으로 문을 닫겠다. 1년이라는 시간을 확보한 구인회와 임원은 다시 한 번 라디오 시장 판매 개척을 조목 조목 검토하면서 뚝심있게 진행해 보기로 결심한다. 구인회의 마음속에는 진주에 장사하러 간다는 자신에게 아버지가 들려준 “사업은 10년은 해봐야 한다. 중간에 그만 두지 말아라”고 한 훈시를 되새겼다. 매경한골발청향(梅經寒苦發淸香)을 인용하면서 마음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다짐도 했다. “무슨 일에는 시련이 있다. 매화는 모진 추위를 겪어야 비로소 향기를 뿜는다. 조금만 더 견뎌보자.”

    1962년부터 실시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이 시기는 기간산업육성에 중점을 두었다./토지주택박물관/
    1962년부터 실시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이 시기는 기간산업육성에 중점을 두었다./토지주택박물관/

    # 위기에서 벗어나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했고 7월 2일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면서 정치와 경제, 사회가 급변해갔다. 5·16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인회는 동생 구평회 상무의 서울대 동창인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장관을 우연히 만났다.

    공보장관은 정부에서 추진하는 업무를 국민에게 홍보하고 알려야 하는데 별다른 홍보 방법이 없어 그 고민을 구인회에게 털어놓았다.

    구인회는 라디오 방송 홍보를 추천했다. 공보장관은 “지금 한국의 농어촌에 라디오 있는 집이 어디 있느냐”며 반문을 하자 구인회는 기다린 듯이 “금성사에서 라디오를 만들고 있다. 정부에서 구입하여 농어촌에 좀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 박정희 대통령의 금성사 방문

    1961년 7월 초,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예고없이 부산 연지동 금성사 공장을 방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7월 7일 구인회는 금성사 제품 T-604 라디오 5000대를 공보부에 기증했다. 농어촌의 생활개선과 국민 지식 개선을 위한 도움이 되도록 경제적인 부담은 컸지만 농어촌에 라디오를 보급하는 것에 동참했다. 1961년 7월 14일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부는 농어촌에 ‘라디오및 앰프 보내기 범국민운동’과 ‘공무원 및 국영기업체 직원의 라디오 및 앰프 보내기 범국민운동 참여 계획’을 발표했다.

    # 라디오- 국민 필수품이 되다

    외국산 밀수품 단속을 강력하게 시행하니 시중에 걸리지 않는 라디오는 국산금성사 제품뿐이었다. 그리고 농어촌에 수만대의 라디오를 보내려고 하니 라디오를 만드는 곳도 역시 금성사뿐이었다. 연지동 공장의 직원들은 폐쇄 직전의 비참한 시기를 겪었던 아픔이 있어 밀려드는 일감에 총력을 다해 제품을 생산했다. 우리나라가 직접 라디오를 생산한다는 것은 일본이나 미국에 종속되어 온 기술의 독립이자 경제의 독립이었다. 당시 전국 라디오 보급 대수는 1959년 30만대, 1961년 말 100만대를 돌파하였고, 1962년 말에는 134만대로 늘어났다.

    1960년대 중반부터 라디오는 국민 필수품으로 정착되었다. 한 가정에 2~3대를 소유하는 가정도 생겼다. 라디오를 생산한 후 적자로 허덕이던 금성사가 흑자기업으로 진입하자 구인회는 또다시 다음 사업을 구상할 수 있는 동력을 갖게 되었다.

    <구인회의 한마디> 소비자의 까다로운 질문에서 답을 찾아라.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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