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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③ 함안 낙화놀이 기능보유자 김현규

흩날리는 불꽃 피우려 아흔 인생 불꽃 태우다

  • 기사입력 : 2022-05-19 08: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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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5월 8일(음력 4월 8일) 함안군 함안면 괴항마을 무진정에서 함안낙화 놀이가 있었다.

    하얀 광목으로 포장된 40㎝ 정도 되는 낙화봉 속의 까맣게 탄 숯가루가 어둠 속에서 불을 만나 점점이 빛으로 바람에 날리며 검푸른 물 위로 떨어지는 장면은 시적 환상이었다. 아무런 대사 없이 연출되는 시극(詩劇)을 보기 위해 계절의 여왕 오월의 밤에 모인 관객들은 시들어가는 시심에 불이 붙어 저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과 함께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김현규 함안 낙화놀이 기능 보유자가 직접 만든 낙화봉을 들어보이고 있다. /함안군/
    김현규 함안 낙화놀이 기능 보유자가 직접 만든 낙화봉을 들어보이고 있다. /함안군/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이 마을의 낙화놀이는 마을 뒤에 있었던 괴산재 학동들과 동민들에 의해 계승되어 내려오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단절되었다가 한국전쟁 직후 1950년대 중반에 마을에서 복원하자는 뜻을 모아 시작은 했으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낙화봉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 김현규씨를 비롯한 청년들이 마을에서 지식인으로 통하던 조영규(趙榮奎,1957년 작고)씨와 연로한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했다. 함안 낙화놀이 기능보유자 김현규(89)씨는 1933년생으로 당시 20세를 막 넘긴 나이였고, 1960년대부터 급속한 경제 성장에 따른 이농현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회지로 떠났지만 그는 고향에 남아 낙화놀이를 할 때마다 중심에 서서 참여했다.

    조선 때부터 전해진 낙화놀이
    일제강점기·한국전쟁으로 단절
    1950년대 복원 뜻 모았지만
    가장 중요한 낙화봉 제작 몰라
    지식인 찾아다니며 자문 구해

    좋은 숯가루로 낙화봉 만들려
    나무 귀한 시절 힘들게 구해
    자신만의 노하우 축적해 제작
    물고기 잡아 행사 경비 마련도

    많은 사람들이 도회지로 떠나고
    숯 취급하는 일 천하게 여겼지만
    낙화놀이 중심에서 70년 활동
    낙화봉 제조법 특허까지 받아
    보존회에 전통 계승하고 자문도

    함안 낙화놀이에 쓰이는 낙화봉. /함안군/
    함안 낙화놀이에 쓰이는 낙화봉. /함안군/
    함안 낙화놀이에 쓰이는 낙화봉. /함안군/
    함안 낙화놀이에 쓰이는 낙화봉. /함안군/

    김현규씨에 따르면 낙화봉과 그 속에 들어가는 좋은 숯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 주변에 나무는 없고 행사를 하려면 숯의 양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우선 많은 나무를 구해야 했다. 여러 집이 분담하여 이 산 저 산 뛰어다니며 나무를 마련한 후, 마을 뒤나 무진정 아래에서 나무를 태워 숯을 만들었다. 어떤 나무라도 태우면 숯이 나오기 때문에 동란 직후에는 나무가 귀해 주로 어린 나무로 숯을 만들었으며 숯이 나오면 절구통 등에 넣어 가루로 만든 후 가는 체에 쳐서 최대한 미세하게 만들어야 했다. 숯이 덜 된 것이나 입자가 크면 불이 물에 떨어질 때 뭉특 뭉특 덩어리로 쏟아져 효과를 제대로 못 낸다고 한다. 잘 만들어진 숯이라야 탈 때 바람이 불면 멋지게 불꽃이 바람을 타고 휘날리며 떨어진다고 한다.

    김현규 기능보유자가 낙화봉을 만들고 있다.
    김현규 기능보유자가 낙화봉을 만들고 있다.

    일정량의 좋은 숯가루가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면 제단된 한지 위에 숯을 고르게 깔고 소리와 빛을 더하기 위해 소금과 화약 같은 것을 첨가한 후 가운데에 심지를 심고 꼬아서 말았다. 한지 속의 숯이 풀리지 않게 바깥에 광목으로 한 번 더 싸서 꽈배기 과자처럼 꼬아 봉을 만든다. 바깥의 광목이 불에 잘 타게 하려면 시장에서 사온 광목도 그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재물을 녹인 물에 광목을 삶는데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기 위해 저울에 달아가며 매년 비교하니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기더란다. 한지와 광목은 숯이 고르게 타는 역할도 하고 안전하게 운반하는데 도움이 된다.

    함안 낙화놀이
    함안 낙화놀이
    함안 낙화놀이
    함안 낙화놀이
    함안 낙화놀이
    함안 낙화놀이

    세월이 흘러 산에 큰 나무들이 많아 현재는 숯을 만들 때 옛날보다 큰 나무를 사용하고 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나무로 시험을 해 보았다고 한다. 참나무는 불이 오래가고 소리를 잘 낼 것 같아 시험을 해 보았으나, 기대보다는 큰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옛날에 낙화놀이를 할 때마다 경비가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 동네 청년들이 모여 무진정 앞 연당의 물을 퍼내고 잉어, 붕어, 가물치 등 물고기를 잡은 후 시장에 내다 팔아서 경비를 마련했다.

    숯을 취급하다 보면 자연히 옷이나 얼굴에 묻히게 되어 천한 일로 생각해 마음속으로 꺼려했으나, 김현규 기능보유자는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자신이 도맡아 한결같이 해왔다.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2008년 기능보유가 될 수 있었다.

    2012년 11월 21일 김현규 기능보유자가 ‘낙화놀이용 낙화봉 제조방법’으로 특허를 받을 수 있게 함안군청에서 도움을 주었다. 유사한 행사를 다른 곳에서 못하게 방해하기보다, 방어용으로 출원을 해두었다. 요즘 청력이 떨어져 소통에 어려움을 겪지만, 사찰과 다른 지자체 등에서 자문을 구하러 오면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함안낙화 놀이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04년 보존회가 탄생되었고 현재는 보존회의 김용희씨(64)와 이응주씨(67) 등이 열정을 가지고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개선된 낙화봉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낙화놀이 유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한다. 학자들은 불교의 연등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낙화놀이가 오랫동안 사월 초팔일을 고집하며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타당성이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함안 낙화놀이
    함안 낙화놀이
    함안 낙화놀이
    함안 낙화놀이
    함안 낙화놀이
    함안 낙화놀이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서는 불(火)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유목민인 아리안족들이 인도로 흘러들어가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불렀던 베다(veda, 지혜) 속에 불은 더럽고 악한 것을 태워 없앤다는 생각이 녹아 있으며 신격화되어 나타난다. 힌두교 때도 불은 베다 때와 거의 같은 대접을 받았다.

    삼국시대 중국대륙과 남쪽의 해양을 통해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 선조들은 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문헌이 없어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불교는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때까지 성행했고, 불교문화에서 생겨난 연등회는 국가 명절로 대접을 받았다. 주로 음력 2월에 하던 연등행사가 고려 의종부터 조선초 태조까지 정월보름으로 옮겨졌다가 태조에 의해 왕명으로 연등행사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 후 농업장려책으로 풍년 기원제 성격을 띤 달집태우기 놀이가 정월 보름에 성행하게 된다. 조선조에서 연등은 성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정도로 4월 초파일에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불교적 의례보다 놀이 색채를 많이 띠게 된 것 같다.


    함안 낙화놀이

    함안군 내에 여러 고을에서 낙화놀이를 했다는 흔적들이 있다. 괴항마을과 동쪽으로 인접한 곳에 대사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고려시대 석불이 아직 남아 있다. 조선시대 기록인 〈함주지〉에 북사(北寺)란 절이 있다고 했는데, 이 마을에도 낙화놀이를 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괴항마을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비봉산 기슭에 있는 봉암사에서도 낙화놀이를 했다는 말이 있고, 괴항마을에서 십리 정도 떨어진 산인면 갈촌에서도 마을 앞에서 낙화놀이를 했다는 말을 노인들이 전하고 있다.

    경남의 다른 시·군에서도 낙화놀이가 있었으나, 괴항마을의 낙화놀이가 2008년 경남도 무형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었던 것은 오횡묵 함안군수가 1890년 4월 초팔일에 남루(南樓)에 올라가 무진정 낙화놀이를 보고 〈咸安叢鎖錄(함안총쇄록)〉에 기록한 문헌과 1963년 괴항마을에서 낙화놀이 행사 후 동민들이 사진으로 자료를 남겨 다른 경쟁지역을 물리치고 비교적 쉽게 문화재가 될 수 있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 전쟁, 과학과 큰 자본이 접목된 불꽃쇼 등의 맹렬한 도전으로 사라질 위기가 있었으나 문화재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김현규 기능보유자의 역할이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조평래 소설가
    조평래 소설가

    조평래 (소설가)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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