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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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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3부 ⑩ LG그룹의 시작, 락희화학공업사 설립

[3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첫 생산 화장품 ‘럭키 크림’ 대성공… LG그룹 초석 다졌다

  • 기사입력 : 2022-04-22 08: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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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인회가 만든 크림 이름은 행운의 크림이다.

    영어 표기는 ‘LUCKY CREAM’이다. 그리고 외국의 여배우 디아나다빈 사진도 붙여져 있다. 마치 외국에서 수입한 크림 같았다.

    동동구리무라 불렸던 1947년 럭키크림 생산 당시의 크림통과 크림(왼쪽 첫 번째), 크림통의 모델인 배우 디아나다빈의 모습(가운데), 창립 65주년 ‘럭키크림 더 클래식’ 기념 스페셜 에디션으로 재탄생한 럭키크림./락희화학공업사/
    동동구리무라 불렸던 1947년 럭키크림 생산 당시의 크림통과 크림(왼쪽 첫 번째), 크림통의 모델인 배우 디아나다빈의 모습(가운데), 창립 65주년 ‘럭키크림 더 클래식’ 기념 스페셜 에디션으로 재탄생한 럭키크림./락희화학공업사/

    # 락희 - 럭키

    ‘LUCKY CREAM’의 한자 표기로는 영어 럭키와 발음이 비슷한 ‘락희’(樂喜·즐거울 락, 기쁠 희)로 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행운과 즐거음을 주는 LUCKY와 락희, 영어와 한자의 뜻과 발음이 너무도 일치하였다. 모두가 최고의 명작이자 상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LG그룹의 역사와 이름의 시작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LUCKY 크림은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였다. 구인회 사장의 첫 생산제품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LUCKY 크림은 대한민국 기업 경제사의 출발을 알리는 제품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품고 있는 제품이다.

    없어서 못 팔 정도의 ‘럭키 크림’ 인기로
    1947년 1월 부산에 ‘락희화학공업사’설립
    크림 전문 생산·판매에 연구·개발까지
    전쟁 중에도 직접 피해 없어 지속 성장

    교직생활하던 장남 구자경까지 불러들여
    사장 구인회 중심으로 가족체제 운영하다
    1956년 신문광고 통해 첫 공개채용 모집
    10대 1 경쟁 뚫은 ‘공채 1기생’ 회사에 큰 힘

    # 락희화학 설립 전후의 배경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가 설립됐다.

    6·25전쟁 후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산업개발, 사회적으로는 근대화를 해야 하는 이중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경제가 모든 것을 압박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가장 시급한 것은 보릿고개를 넘는 곡식도 중요하지만 쌀 한줌이라도 담을 그릇과 밥을 짓는 냄비 등 일상에서 늘 사용하는 생활용품이었다.

    박이나 표주박을 말린 바가지, 미군이 사용한 깡통의 활용, 깨지거나 부서지는 황토 그릇과 옹기 등이 일상 생활용품으로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50~60년 전 부모님이 비누통 가져오라는 것을 “거기 있는 럭키통 가져오라” 한 적이 있다. 한글도 잘 깨우치지 못하였던 할머니도, 어머니도 Lucky라는 영어는 알았다. 지금 20대 청년들이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 먼 구석기, 신석기시대 도구로 생각할 것 같다.

    스마트폰 외형이나 컴퓨터 외형, 자판기 등은 모두 사출기에서 나온 것이다. 재료의 첨가에 따라 다양한 색상을 내지만 그 시절 프라스틱으로 만든 단단한 비누통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1950~1960년대 시작된 이러한 제품의 시작에서 오늘날 첨단 제품의 생활용품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설립 초기 럭키 크림을 생산한 락희화학공업사 부산 공장./LG화학/
    설립 초기 럭키 크림을 생산한 락희화학공업사 부산 공장./LG화학/

    # 락희화학 설립 과정 이야기

    럭키크림의 판매가 단순한 형태의 조직으로 운영하기에는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매출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수요에 맞춰 생산시설과 공장을 증설하고 규모에 알맞게 직원도 선발하고 생산량도 늘려 나갔다.

    조직의 형태를 갖추고 운영하기 위해 럭키크림을 전문으로 생산, 판매하는 ‘락희화학공업사’를 1947년 1월에 설립하였다. 부산시 서대신동 3가 13번지는 구인회의 집이자 공장이고 사무실이다. 자본금 300만원에 종업원은 20명 규모였다. 1950년 3월, 락희화학공업사는 서울에서 생활하던 구태회 주택 마당 한 켠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화장품을 연구하였다. 이곳에서 타 회사와 다른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 위하여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이렇게 개발된 ‘투명크림’은 소비자에게 더 인기가 있는 상품이 되어 생산하기가 무섭게 시중으로 팔려나갔다.

    # 구자경의 락희화학 공장 참여

    1947년 4월, 지수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장남 구자경이 부산사범 부속초등학교 교사로 전근을 와 부산에 거주하였다. 이회창 전 국무총리 부인 한인옥 여사와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이 구자경의 제자이다. 락희화학의 크림 사업이 번창하자 일손이 많이 부족하여 구자경도 교직에만 전념할 여건이 아니었다. 낮에 교사로 근무하고, 야간에도 공장일을 도와드리고, 방학 때도 종일 공장일에 매달렸다. 1950년 4월, 구인회는 아들 구자경을 불러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일을 돕도록 하였다. 중·소 도매상 관리, 제품수송, 포장 등 처리해야 할 공장의 일에 비해 일손이 너무 부족함을 알게 된 구자경은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할 여건이 아니었다. 지수보통학교 2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3년 모두 5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였다.


    # 락희화학의 경영체제

    락희화학공업사는 사장 구인회를 중심으로 조직을 새로 편성하였다. 초기에는 모두 가족 중심의 경영체제였다. 구정회가 원료의 섭외와 관청업무를 맡았고, 구태회는 연구개발을, 구자경은 생산 담당을, 허준구는 부산 시내 영업과 수금을 담당하였다. 구자경의 동생인 구자승이 경리와 출납업무를 담당하였다.

    락희화학의 특징 중 경영진과 주요부서의 책임자는 구씨 가족과 허씨 삼형제, 처남, 매부 등 대부분 가족 중심의 운영이었다. 혈연과 지연 중심의 집안사람으로만 주요 경영진을 구성하기에는 부족한 인원이라 더러는 주요 경영진의 절친한 친구나 고향 친구, 지인 자제들 중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특별 초빙하기도 하였다.

    기술직이나 생산직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여 가족 주변 사람으로는 한계가 있어 그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들을 수소문하여 특별채용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락희화학은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직시한 구평회 상무가 인재 확보의 중요성을 구인회에게 강조하였다. 1956년 구인회는 처음으로 신문 광고를 통해 공개 채용을 실시하였다.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며, 이때 많은 인재들이 공채 1기생으로 입사를 하여 회사의 성장 가도에 큰 힘이 되었다.

    경쟁률이 10대1 이상이었고 시험과목은 영어, 전공, 논문이었다. 시험문제 출제와 감독, 채점은 구태회 전무, 구평회 상무, 박승찬 상무가 하였다.

    # 럭키크림 성공 요인

    럭키크림이 이렇게 단기간에 화장품 업계 대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6·25전쟁의 혼란 속에 서울지역에 공장을 가진 화장품 회사들은 생산시설이나 창고 재고품이 모두 손실되었다. 그러나 락희화학은 서울에 보낸 외상 물건값은 받을 수 없었지만 공장이 부산에 있어 전쟁의 피해를 직접 받지 않았다. 기계도, 설비시설도 파괴되지 않아 계속하여 생산을 할 수 있었고, 전란중이지만 판매도 지속적으로 가능하였다.

    둘째, 타 회사와 차별화하는 반투명크림을 개발하여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셋째, 글리세린과 향료 등 원료를 먼저 확보하여 생산에 문제가 없도록 하였다.

    넷째,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좋은 제품을 만들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공급하여 소비자의 신뢰가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행운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럭키크림은 좋다’는 인식을 소비자가 갖도록 전 가족이 뭉쳐 좋은 재료를 찾고 제품개선을 위한 연구 노력 결과이다. 이런 노력으로 후발업체이지만 락희화학의 럭키크림은 마침내 흥아화학의 아마쓰 크림보다 더 많이 팔리는 유명상표가 되었다.

    <구인회의 한마디> 품질을 높이고 값을 싸게 유지하는 것은 기업인의 기본 의무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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