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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3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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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쑥을 뜯는 여인들- 정선호

  • 기사입력 : 2022-04-14 08: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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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봄, 햇볕 좋은 날에 저수지 방죽에서

    중년의 아낙들 몇이 쑥을 뜯고 있어요

    겨울 철새들 모두 떠나 적막한 저수지에

    아낙들이 쑥을 뜯으며 나누는 도란거림이

    물살처럼 저수지로 퍼져 나가요


    태초에 쑥과 마늘 먹고 여인이 된 웅녀는

    환웅 사이에 단군을 낳고

    단군의 부인은 딸들을 낳았지요

    딸들은 수천 년 동안 딸을 낳아

    여자들은 봄에 본능처럼 쑥을 뜯었지요


    가야가 신라에게 무너지던 그해 봄에도

    신라가 고려에 나라를 바친 그해 봄에도

    고려가 왕조를 잃은 그해 봄에도

    조선이 나라를 빼앗긴 그해 봄에도

    여인들이 그 저수지의 방죽에서 쑥을 뜯었지요


    쑥으로 음식 만들어 식구들에게 먹이고

    자식들 공부도 시켰지요

    후손들은 쑥 뜯던 제 어머니를 떠올리며

    진한 쑥 향기 세상에 흩뿌리고 있네요


    ☞ 환장할 봄이 쳐 들어온다는 기별에 아낙들이 본능처럼 방죽으로 모여듭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의 정령을 깨우기라도 하는 걸까요. 극한 환경에서 자생한 쑥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의식을 치르듯 푹푹 칼로 쑥을 캡니다. 예부터 아낙들의 봄 마중은 코끝에 흩날리는 쑥 향기로 시작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햇살 가득 등에 업고 두어서넛 모인 방죽은 도란도란 수다 삼매경입니다. 장성하여 곁을 떠난 자식들 얘기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자랑까지 버무려져 어느새 노을이 물들고 바구니는 부풀어 오릅니다. 된장을 풀어 들깻가루 한 움큼이면 저녁 식탁으로 그만이라는 중년의 아낙들이 제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방죽을 걸어 나갑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즈음, 옛집에 들러 늙은 어머니가 끓여준 쑥국 한 그릇에 다시금 기운을 차려보는 봄날입니다. 천융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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