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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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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정년- 김시탁(시인)

  • 기사입력 : 2022-03-23 19:5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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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공무원의 정년이 만 60세, 공무원이 아니어도 대부분 65세를 넘기기 어렵다. 요즘은 백세시대라고 하니 이대로라면 정년퇴직 후에도 약 30년을 일정 직업 없이 살아야 한다. 그러니 정년을 앞둔 사람들은 만감이 교차한다. 당장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니 아침 일찍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늦잠을 퍼질러 잘 수도 있어서 마음이 들뜬다. 거기다가 등산, 낚시, 골프 등 취미생활을 즐기고 해외여행도 마음껏 다닐 수 있다. 자유를 끌어안고 뒹구는 것도 즐거운데 연금까지 나오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며 눈꼬리가 슬쩍 귀에 걸린다.

    그러나 막상 정년을 맞이했다고 한들 세상살이는 정년이 없지 않은가. 직장을 그만두면 일상의 리듬이 깨어져 그 공백이 넓고도 깊다. 그걸 메우는 방법은 시간을 잘 주물러 맛있게 비벼 먹고 영육의 살이 차오르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다. 그 시간이란 비빔밥도 혼식할 때는 적당히 때우면 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라면 간을 잘 맞추어야 한다.

    아내는 매일 출근하던 사람이 집에 있으니 마음대로 나다니지도 못하고 신경이 쓰이는데 끼니까지 챙기게 된다면 아무리 말을 아껴도 튀어나오는 입은 어쩔 수 없다. 그나마 몸이라도 건강하면 다행인데 행여 폐경과 함께 골다공증이라도 따라붙으면 갱년기 우울증으로 이어져 최악의 상황이 된다.

    어디든 가서 한나절을 통째로 말아먹고 귀가하는 게 도와줄 때도 있어 당당하게 집을 나서지만 막상 갈 곳이 마땅찮다. 자주 오르던 산을 다시 올라도 관절이 시려서 정상은 쳐다만 보다 내려오고 바닷가에서 낚싯대를 던져봐도 부표처럼 허전한 마음만 둥둥 떠다닐 뿐 낚이는 건 허무와 허탈뿐이다. 끼니를 챙겼으니 배는 부른데 영혼이 허기져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 가슴속으로 황소바람이 기어든다. 그나마 골프나 여행에 재미를 들였지만 비용이 만만찮아 타 쓰는 용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니 용돈이 바닥나면 물간 도다리나 가자미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그것도 유효기간이 있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일했으나 막상 정년을 맞아 굳건하게 제자리를 잡지 못하면 절로 위상이 내려앉아 고개는 처지고 말문이 닫힌다. 닫힌 말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질병뿐이다. 고혈압과 당뇨는 친분을 과시하며 어깨를 걸고 당당하게 오지만 주름살과 넉살과 군살과 뱃살은 살살 기별도 없이 온다. 갈수록 기억은 가뭄에 논바닥이고 건망증이 도져 왼손에 침 묻히고 오른손으로 신문 넘기기 예사다. 나이가 들수록 속이 밀폐해져 행여 그 속에 불이라도 나면 연기도 없어서 남들이 쉬 알아차리지 못하니 속수무책이다. 전소되거나 제 풀에 꺼져 소강상태가 된들 이미 기력이 쇠약해져서 아무리 싱싱한 시간을 베어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는다.

    막상 계획 없이 정년을 맞아 대책 없이 살다 보면 어김없이 맞게 되는 비애들이다. 그러니 질병을 따돌리고 건강한 삶을 지탱하려면 정년 전에 미리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경제적 대가보다 정신 건강에 좋은 일이 우선이다. 정년의 60대는 따로 개발이나 검증이 필요 없다. 축적된 지식과 노련한 경륜으로 무장되었으니 적재적소에 투입되면 바로 가치를 발휘하는 완성재가 될 수 있다. 정년의 삶은 겹겹의 세월을 농축시켜 가공한 보약 같아서 잘 먹어주면 큰 에너지를 발휘한다. 그러니 정년 후의 삶도 경제적 가치가 살아 있다면 얼마든지 현역으로서 고품격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산 노을 바라보며 한숨 쉬며 담배 한 대 피워 물 여유 있다면 그 시간에 물부터 주고 희망을 파종하자. 그렇게 뿌리내리고 가지 뻗는 나무는 속이 깊어 열매도 튼실하고 그 맛도 달다. 인생에 정년은 없다.

    김시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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