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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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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3부 ⑥ 진주에서 포목장사 하겠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대가족 돌보려 진주서 포목점으로 생애 첫 사업 시작

  • 기사입력 : 2022-03-18 08: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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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버지부터 자녀까지 4대가 함께 생활

    늘어나는 가족에 경제적으로 힘들어

    조부와 아버지께 힘들게 장사 허락 구해

    1931년 26세 때 지금의 진주 중앙시장에

    동생 구철회와 함께 자본금 3800원으로

    포목 취급하는 ‘구인회상점’ 열어 운영


    구인회 집에는 4대가 함께 생활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며 경제적 활동보다는 후학이나 지인들에게 늘 베풀기만 하시는 만회 할아버지가 계셨다. 그리고 불어나는 가족들 때문에 재산을 더 늘리지 못하고 조금씩 전답을 처분해야만 하는 아버지도 계셨다. 아래로 다섯명의 동생과 3남 1녀의 자녀들이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 아버님! 장사를 하겠습니다

    지수마을 협동조합 대표와 신문사 지국장 그리고 농사일만으로 가정을 돌보는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힘이 들었다. 1930년에는 승산리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서울로 유학 가서 보고 배웠던 것들을 승산리에서 활용하기에는 이곳 마을이 너무 좁고 답답하기만 하였다.

    1930년 늦은 가을, 구인회는 먼저 중간 채에 계시는 아버지 방문을 두드렸다.

    “아버님, 제가 장사를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는 “너는 유서 깊은 선비집안의 장손이다. 그리고 우리집안은 대대로 내려온 집안 전통이 있는데, 네가 장사를 한단 말인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조선후기까지는 신분제사회에서 ‘사농공상’이라 하여 상인은 천시되었다.

    구인회가 장사를 시작하려는 1930년대는 신분제도 사라지고, 상업이 천시되는 시기는 아니었지만 유교 가풍을 중시하는 구인회 아버지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얼마 후 구인회는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채를 찾아갔다.

    # 할아버지! 장사를 하고 싶습니다

    “할아버지! 동생들도 챙기고 자녀들도 보살펴야 하는데 농사일만으로는 현재 어려움이 있습니다. 장손인 제가 진주에 가서 장사를 해 가정을 꾸려 보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다. 할아버지는 일언지하 거절보다는 손자 구인회에게 “그래 인회야, 무슨 장사를 해보고 싶으냐” 하고 물었다.

    “진주에 가서 포목장사를 하려고 합니다.”

    “밑천은 있느냐?” “없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좀 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두문불출하는 내가 무슨 돈이 있겠느냐. 그리고 서투른 장사를 하다가 집안의 재산이 탕진되면 너의 처자나 가족들은 어찌 할 것이냐?”

    “할아버지, 저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마을조합에서 하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장사는 의욕만으로 되는 것은 아닌데, 네가 해낼 수 있겠느냐?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하시고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인회는 꼭 장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장사 밑천 즉, 종잣돈을 구하기 위해 여러 곳에 지인을 찾아 다녔다. 그 소문이 할아버지 귀에도 들어갔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구인회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오히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설득하여 구인회가 장사를 하도록 허락하였다.


    # 장사를 하려면 10년은 견뎌라

    아버지는 구인회를 불러 “네가 장사를 하는 것에 할아버지도 허락하셨고, 나도 결국 허락을 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러나 진주에 가서 장사를 할 때 꼭 이 말만은 잊지 말거라.”

    “나는 장손인 너를 믿기에 네가 장사하는 것에 허락한다. 장사를 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견뎌 나가야 성공할 수 있다. 중간에 그만 두지 말아라. 특히 진주 사회는 기생문화도 발달된 곳이라 사회 환경이 복잡하니 주변 관리를 잘 하거라. 좋지 않은 소문이 나면 당장 너를 다시 집안으로 불러올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구인회에게 장사 밑천 2000원(당시 쌀 1가마 4원50전)을 내놓았다.

    # 진주에서 구인회상점을 열다

    구인회는 당시 진주에서 가장 큰 중앙시장을 다니면서 장사할 점포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2000원으로 진주에서 포목점을 차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지금의 중앙시장에서 공화상회를 운영하는 동생 구철회를 찾아가 포목점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하자 아우도 흔쾌히 수락하고 1800원의 돈을 보탰다.

    1931년 7월 식산은행 건너편(지금의 진주 중앙시장 입구)에 자본금 3800원으로 ‘구인회상점’ 간판을 걸었다. 1931년 26살의 구인회가 자기 이름을 걸고 생애 첫 사업을 진주에서 시작한 것이다.

    # 포목점을 시작한 이유

    구인회가 장사를 시작하면서 취급품목을 포목으로, 장소를 진주로 결정한 이유가 있다. 지수마을 협동조합 운영 시 광목과 비단 등 포목 관련 경험이 있었고 이윤이 좋아 장사가 잘되면 수익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주는 1925년까지 도청 소재지가 있었고, 서부경남 제일의 소비도시였다. ‘북평양 남진주’라는 표현처럼 기생문화와 함께 검무 등 예술이 발달하여 포목점 수요가 풍부한 곳이었다.

    오늘날 진주가 풍류도시, 문화·예술도시로 인정받는 배경에는 1949년 대한민국 예술제의 시초인 개천예술제가 개최되면서이다. 개천예술제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한 동기 이 경순 시인과 경남일보 사장과 주필을 지낸 파성 설창수 시인, 현대 한국화의 대가 내고 박생광 화가 등 8인의 발기인에서 시작되었다.

    # 실크도시 진주

    진주를 실크도시라 하였다. 진주와 실크가 연결되는 사실적 내용이 많이 있다.

    고려시대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종자를 가져 와 목면을 시배한 유지가 진주에서 가까운 단성면 묵곡리이다. 1912년에 발행된 책자에도 “진주지역의 비단공장들이 기계가 낙후되어 있다. 비단의 품질이 낮아 일본 비단 직기를 들여와서 생산을 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중안동 구 도립병원 부지에 1910년 개교한 진주공립실업학교는 1921년 진주공립농업학교(전 국립경남과학기술대학교 전신, 현 경상국립대학교)로 변경, 진주면 천전리(현 강남동)로 이전하였는데 이 터가 잠사중학교 부지였다. 진주에 잠사중학교가 설립될 정도로 실크 관련 일이 성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잠사: 누에에서 실을 뽑는 일)

    1924년 진주에 최초로 방직공장인 ‘동양염직소’가 설립되었다. 이 염직소는 근대식 실크제직기가 도입되어 대량생산과 실크에 무늬와 그림을 넣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였다. 지금의 진주 중앙시장 앞 대로변에 있는 우리은행 진주지점 자리가 ‘동양염직소’ 자리이다. 문익점의 손자 이름은 ‘문래’이다. 실을 뽑는 물레를 ‘문래’가 만들었다 하여 문래라 불렀던 것이 오늘날 ‘물레’로 변형되었다.

    많은 장사 품목 중에 구인회가 포목점을 한 것은 우연일까? 철저한 시장 조사의 결과 일까? 그 혜안이 궁금하다.

    <구인회의 한마디> 형제간의 우애와 인화는 더더욱 필요하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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