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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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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기를- 윤영미(서예가)

  • 기사입력 : 2022-02-14 2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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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세한도(歲寒圖)가 모두의 품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추사체와 더불어 세한도를 누구나가 잘 알고 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 때 그의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이 중국 북경에서 두 번이나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준 답례이다. 그 변함없는 의리를 빗대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대개 세한도를 보며 잣나무와 소나무를 이야기하고, 쓸쓸한 집 한 채를 떠올린다. 하지만 세한도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경로를 거치게 되는데 이것 또한 세한도가 더 특별한 이유이다.

    세한도는 이상적이 죽고 그의 제자 김병선 손으로 넘어갔고, 그의 아들 김준학이 소장하게 됐으며 후에 휘문고 설립자 민영휘의 소유가 됐다.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에게 흘러간 세한도는 일본의 추사 연구가 후지쓰카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것을 서예가 손재형 선생의 끈질긴 노력으로 되찾아 오게 됐고, 그 후 문화재 수집가 손세기와 그의 아들 손창근이 소장 중 2020년 국가에 아름다운 기증으로 대한민국 미술계는 한바탕 떠들썩하게 됐다.

    세한도가 역사의 풍파에서 흘러오는 동안 문인들과 서예가들이 적은 발문과 찬시가 14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에 적혀 있어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됐다. 세한도는 작품의 의미도 특별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추사의 세한도를 귀히 여기어 관심 있게 지켜보던 중 그림의 오른쪽 밑에 찍혀있는 도장 하나를 바라보게 됐다. 양각으로 새겨진 ‘長毋相忘(장무상망)’이라는 도장이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기를’ 이란 뜻을 가진 장무상망. 이 도장을 발견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순간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추사의 고마움이 보였고 이상적의 기쁨이 느껴졌다. 그 여운이 얼마나 오래가던지 이후로 장무상망을 자주 얘기하곤 했다.

    장무상망이 어디 추사의 마음뿐이겠는가! 얼마 전 주변에서 나를 아껴주었던 사람과 단절되는 일이 생겨 버렸다. 사소한 감정이 사람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그는 나에게 자동차 운전할 때 등을 오토(AUTO)모드로 두도록 권해 주었고, 글을 쉽고 짧게 쓰길 권했다. 습관적으로 생각 없이 길게 찍어 대던 말 줄임표에 점 세 개만 찍기를 얘기했다. 걸음걸이가 서예가 답지 못하다고 하니 길을 걸을 때 가게 유리를 쳐다보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몸무게를 줄여보려 걷는 일에 온 정신을 쏟았다. 돌아보니 습관처럼 변해있는 좋은 모습들이 온통 관심으로 변화된 일이었다. 후일 세한도에서 장무상망을 만나고 오래도록 소나무와 잣나무가 되어주지 못한 내 처신이 내내 부끄러웠다.

    추운 겨울의 황량함과 고독을 마른 붓칠로 그려낸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집 한 채 그림보다도, 청나라 명사들이 쓴 찬(讚)과 배관기(拜觀記) 글씨보다도, 서예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도장 ‘장무상망’이었다.

    서예가는 마음에 드는 글귀를 발견하면 여러 상상을 한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벼루에 먹을 갈아 일필휘지 하거나 때로는 칼을 잡고 돌이 터져 나가는 희열로 새기고 싶어진다.

    SNS로 전달되는 세상에 합류해 살고 있지만 소심한 A형 서예가는 미안함을 핸드폰 메시지로 전달하는 것이 서툴다. 추사가 그러했듯이 장무상망이라는 넉 자를 정성껏 새겨 꾹꾹 힘을 줘 찍어본다. 하얀 종이에 붉은 글씨로 찍혀지는 장무상망을 보며 사람의 심정이 글자 몇 자로 표현되는 것이 기적이라 여겼다.

    애절한 청춘남녀의 연애편지가 아니라도 좋다. 생각해주고 안부를 서로 물어봐 줄 수 있는 사람끼리 부릴 수 있는 최상의 욕심이 ‘오래도록 우리 서로 잊지 말자’ 장무상망이었다.

    윤영미(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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