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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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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여행의 기원- 박태현(시인)

  • 기사입력 : 2022-02-10 20: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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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는 나를,

    핏덩이를 강제로 기차에 태웠어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검은 기차

    엄마도 함께 타고 있어요

    내가 울면 젖을 먹이고

    내가 자면 들에 나가 일해요

    내가 숟가락 들자

    당신은 기차에서 혼자 내렸어요

    우는 나를 두고 목적지라며

    무정하게 내렸어요 나의 목적지는

    얼마나 남았는지 공허의 레일을 딛고

    환멸과 치욕을 도시락처럼 먹으며

    터널을 통과하고 있어요

    잃어버린 메아리를 싣고

    덜컹거리며 늦은 생애를 통과하고 있어요

    나의 모습이 환하게 떠 있어요

    오늘 밤엔 강을 건너는지

    바람이 차가워요


    우리는 검은 기차를 타고 간다. 그러나, 탈 때처럼 자신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강제로 내리게 한다. 자신이 내려야 할 역이 어딘지도 모르고 우리는 기차를 타고 여행한다.

    핏덩이인 나를 우리 엄마는 농촌행에 태웠다. 그 기차에서 나는 엄마를 잃었다. 우는 나를 혼자 두고 목적지라며 엄마는 매정하게 내렸다. 그래서, 나는 진창의 보리밭 좌석에 땅개처럼 버려졌다. 삽으로 물도랑을 내고, 호미로 둑새풀도 캐고 북을 돋우었다. 양식 걱정으로 허리 휘던 망종(芒種), 푸른 보릿대가 누렇게 변한 부황(浮黃)의 시간대를 베어 도리깨로 타작했다. 땀이 마른 얼굴은 염전이었다. 이마를 만지면 소금 알갱이들이 하얗게 부스럭거렸다.

    보리타작 끝 마당에 보릿짚을 모아 태웠다. 뭉텅-뭉텅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가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내 모습 같았다. 보릿대를 갈아엎고 손으로 모내기했다.

    소낙비가 얼굴에 솟는 땀방울을 걷어 내면, 종아리에 붙어 피를 빠는 거머리밥이 되는 줄도 모르고 저물도록 잔뜩 허리를 구부리기도 했다. 달밤이면 뜸부기 울음소리가 논바닥을 휘적거리고 다녔다.

    들판에 기러기 울음이 벼알처럼 떨어지고 숭늉 같은 구수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면 추수를 시작했다. 돈보다 명예보다 더 값진 나락, 가난의 설움을 가마니에 담아 곳간에 쌓아놓고 틈만 나면 들여다보던 그 몇 해 사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소리를 끌고 신축역(辛丑驛) 쪽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기차가 임인역(壬寅驛)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미 나와 함께 타고 가던 사람 절반이 기차에서 내리고 낯선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이렇게 몇 차례 기차가 새로운 역에 닿으면 나도 나의 목적지에서 내려야 할 것이다. 지금도 내가 탄 기차는 조금의 연착도 없이 깊은 한숨을 훅훅 내뿜으며 덜컹거리고 있다.

    먼 기차 여행, 언제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모르는 긴장감은 오히려 ‘내 안의 역’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이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냉정히 돌아보고 깨달아야 할 무언가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지구본 같던 내 얼굴에는 새로운 대륙이 자꾸 생기지만 모든 건 간이역처럼 지나간다. 어차피 내가 타고 가야 할 기차 여행이라면 즐겁게 생각하는 게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박태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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