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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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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⑭·끝 뿌리깊은 선비의 고고함 가진 경영인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소신·철학 담은 기업경영으로 한국경제 밝힌 ‘샛별’

  • 기사입력 : 2022-02-04 08: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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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년 조홍제는 홀로서기 1년 만에 효성그룹의 중심이 될 효성물산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면서 계열회사 3개를 직접 경영하였다.

    조선제분, 대전피혁, 한국타이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갔다.

    회사가 어느 정도 정착하게 되자 조홍제는 한국 섬유시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주력기업 효성물산은 화학, 섬유 관련 전공자들을 일반직보다 더 많이 채용하거나 영입하였다. 그리고 계열회사의 업무를 전체 총괄하여 전담하는 기획팀을 효성물산에 별도 구성하였다.

    함안군 군북면에 있는 조홍제 생가.
    함안군 군북면에 있는 조홍제 생가.
    펄벅이 ‘대지’를 집필한 중국 려산 별장을 닮은 여항산 풍경과 봉성저수지.
    펄벅이 ‘대지’를 집필한 중국 려산 별장을 닮은 여항산 풍경과 봉성저수지.

    # 계열회사 전체 총괄 기획팀 구성

    조홍제는 기획팀의 신규사업 개발에는 6가지 원칙만 제시하고 모든 권한을 기획실 직원들에게 위임하였다. 조홍제의 기업 경영에 대한 의지와 철학이 담긴 내용이다.

    1) 수입대체 효과가 크고 기간산업 분야일 것 2) 경제성이 높고 사업전망이 좋은 업종을 선택할 것 3) 차관을 도입한다는 전제하에 대단위의 현대식 공장을 구상할 것 4) 우수한 외국기술을 도입하되 계속 그 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분야는 피할 것 5) 무리한 차입으로 재무구조가 나빠지지 않도록 능력 범위 내에서 계획을 세울 것 6) 정책적 고려로 제약이 많은 업종은 피할 것 등이다.

    이를 기준으로 각 분야 전문가와 학자, 외국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조사, 연구한 결과 기획노트만 20여권의 분량이 완성되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둔 말이산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둔 말이산고분군.
    흩날리는 꽃불에 하늘도 감탄하는 함안 무진정 낙화놀이.
    흩날리는 꽃불에 하늘도 감탄하는 함안 무진정 낙화놀이.

    # 첫 번째 신사업 검토, 화학섬유

    1960년대 초 효성물산 기획팀은 신사업 후보를 결정하였다. 기간사업 분야, 기초화학 분야, 의식주 필수 물품 분야가 주요 검토 대상이었다.

    원료를 국내에서 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하니 화학섬유의 일종인 ‘비닐론’이 우선 사업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대규모 공장을 세울 경우 기계설비보다 원료 조달이 가장 큰 문제로 드러난다. 원료가 국내에서 조달되지 않을 경우 외국에 의존하여 수입해야 하는데, 외화가 부족하여 원료수입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 단점으로 분석되었다. 장점은 기초 원료 모두 국산 소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은 마산(창원)에 공장 설립 계획을 수립하고 다시 한번 더 심도있게 최종 자료를 수집 분석한다. 시장조사 몇 개월 후, 그동안에 비닐론 사업이 석유화학분야 원료로 옮겨가는 과정이라 장기적으로 불투명하였다. 따라서 최종 심의결과 유보하기로 하였다.

    1963년 홀로서기 1년 만에 효성물산 정착
    조선제분·대전피혁·한국타이어 경영하며
    계열회사 총괄 기획팀 꾸려 신사업 검토
    1966년 울산에 독자기술 ‘동양나이론’ 설립
    한국 최대 나일론 생산으로 ‘재계 5위’ 올라

    # 두 번째 신사업 검토, 석유 관련 윤활유 사업

    석유와 관련 있는 윤활유 업종을 분석하였다. 1962년 10월 대한 석유공사의 울산정유공장이 착공되어 석유를 다루는 분야가 늘어나자 이와 관련된 윤활유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였다. 당시 한국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시기이고 원료도 국내 정유 공장에서 공급이 가능하여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국내외 공장 수와 자동차 수, 선박 수로 볼 때 시장이 너무 협소하다. 성장 속도가 느려 자금이나 매출에 압박이 심할 것이다”라는 의견이 제출되었다. 주력기업으로 수년 내 기대가 어렵다는 판단에 사업을 보류하기로 결정하였다.

    불사이군 ‘조려’ 등 생육신을 추모하는 서산서원.
    불사이군 ‘조려’ 등 생육신을 추모하는 서산서원.
    칠원읍에 있는 애국지사 손양원목사 생가와 기념관.
    칠원읍에 있는 애국지사 손양원목사 생가와 기념관.

    # 한국경제의 급속한 변화

    1~2년 사이 한국경제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였다. 석유화학 공장이 설립되는 등 섬유 수요가 다른 생필품에 비해 빠른 성장 추세를 보였다. 첫 번째 분석해 온 화학섬유 사업이 이제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조홍제는 다시 나일론, 아크릴, 폴리에스터 세 가지를 놓고 주력 기업을 찾고자 다각적 분석에 돌입하였다. 이때 조홍제가 일본 유학 시 교제해 온 저명한 일본 경영가를 만났다. 이 분은 나일론 원료인 카프로락탐 생산업체를 경영하고 있었다.

    조홍제에게 “어떤 나라이든 공업화는 경공업인 섬유산업의 단계를 거쳐서 발전한다. 한국의 지금 경제로는 섬유산업이 매우 유망할 것이다”라고 의견을 주었다. 마침 1964년 한국은 섬유 생산 시설이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당시 화학섬유 제품에는 레이온, 비닐론, 아크릴, 나일론, 폴리에스터로 세분되어 있었다. 조홍제는 최종 선택을 하였다. 그것은 나일론이었다.

    # 동양나이론 설립, 국내 재계 5위에 오르다

    “실크같이 우아하고,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고, 인류가 바라는 것, 꿈의 섬유” 이 표어는 나일론 섬유개발사로 성공한 미국 듀퐁사의 회사 구호이다. 마침내 효성물산의 1차 신규사업은 ‘마법의 섬유’라 불리는 나일론으로 결정되었다.

    1966년 3월부터 6월까지 효성물산 울산공장 정지공사를 시작하였다.

    동양나이론의 완공은 조홍제가 꿈꾸던 기술이 집결된 회사이다. 독자기술로 만든 공장, 비용보다 미래를 보고 기술력을 중시한 공장이다. 동양나이론은 한국 최대의 나일론과 타이어코드를 생산하면서 효성그룹을 명실상부 국내 5대 대기업그룹으로 만들었다.

    의사로서 독립운동을 한 대암 이태준선생 기념관.
    의사로서 독립운동을 한 대암 이태준선생 기념관.
    국내 유일의 고려마을 고려동.
    국내 유일의 고려마을 고려동.

    #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연재를 마치며

    늦었다고 다 늦은 것이 아니다. 만우(晩 늦을 만, 愚 어리석을 우).

    늦었다고 급하게 하지 않았던 조홍제의 호(號), 만우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조홍제는 회고록에도 밝혔다. 일본 법정대학을 졸업할 무렵 교수의 길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사업가로 갔다.

    아들 조석래 효성그룹 2대 회장도 초기에는 학자가 되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미국 유학을 마치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았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아버지 조홍제를 회고한 글 중 일부이다.

    “아버지께서는 사업가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분이었다. 사업을 하려면 소위 ‘장사꾼’이 되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이상이 너무 높아 오히려 선비의 성품이 더 드러났다.”

    아들의 평가 뿐 아니라 당시대를 함께 한 기업인들도 한결같이 조홍제를 “한국에서 가장 선비 정신이 있는 품격 있는 기업가”로 평가한다.

    효성은 이제 샛별이 되어 한국 경제를 밝혀주고 있다.

    조홍제 회장은 1975년 70세가 되던 해 그룹의 안정적인 정착과 개인의 건강상의 이유로 3명의 아들에게 기업 경영을 맡겼다. 조석래에게는 덕을 숭상하면 사업이 번창한다(숭덕광업·崇德廣業). 조양래에게는 쉬지 말고 힘을 길러라(자강불식·自强不息), 조욱래에게는 늘 재난에 대비하라(유비무환·有備無患)의 휘호를 주었다.

    56세에 효성물산이라는 무역회사를 70세까지 약 15년간의 짧은 기간에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79년 공정거래위원회 한국재벌사에 따르면 현대, 럭키, 삼성, 대우 그룹에 이어 국내 5위 대그룹에 효성그룹을 지정하였다. 조홍제 창업주의 인품과 경영 철학이 함축된 잠언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지적 능력과 인격을 성장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이 참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의 글을 정리하고 펜을 내려놓으니 뿌리깊은 선비의 고고한 모습이 떠오른다.

    <조홍제의 한마디>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미련을 가지고 버리지 않으면 더 큰 것을 잃는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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