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8일 (목)
전체메뉴

[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⑬ 내 나이 56세, 다시 시작하다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이병철과 동업 청산 후 ‘효성그룹’ 새 역사를 쓰다

  • 기사입력 : 2022-01-27 21:43:56
  •   
  • 1960년 3월, 일본 동경에서 이병철 사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조홍제는 이병철 사장으로부터 동업을 정리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조홍제는 때가 되면 동업 청산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병철의 제안을 들은 조홍제는 동업 청산에 마음을 굳히고 구체적으로 매듭을 짓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각자의 지분율에 대한 이야기에서 서로의 생각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효성그룹의 성장 주역인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전경./조홍제 회고록/
    효성그룹의 성장 주역인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전경./조홍제 회고록/

    # 이병철과 동업 청산

    동업청산과 관련한 조홍제 회고록의 내용이다. “이병철을 1949년 봄 서울에서 만나 삼성물산공사에 지분을 투자하고 참여한 후 6·25 전쟁을 겪었다. 다시 1951년 4월 부산 피란 시절에 설립한 삼성물산을 시작으로 1959년 9월까지 약 10년 이상 동업을 하였다. 무역업으로 시작한 삼성물산을 주축으로 제법 많은 회사를 운영하는 규모로 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제일제당, 제일모직은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명실공히 모기업인 삼성물산의 이름을 붙여 삼성그룹으로 성장시켰다. 1958년에는 삼성이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로 부상하였다.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역시 나의 모든 열정과 땀이 곳곳에 묻어 있는 회사였다.”

    동업 청산의 말이 나온 지 2년 반의 세월이 흐른 1962년 8월, 이병철 사장 자택에서 동업 청산과 관련한 협의를 마무리하고 조홍제 제일제당 사장은 삼성을 떠났다.

    다시 조홍제 회고록 내용이다. “이병철과 마지막 동업 정리를 하면서 내린 결단은 조홍제가 70여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수많은 어려운 결단 가운데서도 가장 현명하게 내렸던 결단이었다”고 하였다.

    삼성물산부터 시작된 10년간의 동업관계
    1960년 이병철 제안으로 청산 마음 굳혀
    1962년 8월 관련 협의 끝내고 삼성 떠나
    56세 때 효성그룹 모태 효성물산으로 독립

    공장 건설·기업 경영 등 풍부한 경험과
    미래 시장변화 예측하는 탁월한 감각으로
    동양나이론 설립부터 조선제분 인수
    한국타이어·대전피혁 경영까지 승승장구

    조홍제 회장의 친필 사인
    조홍제 회장의 친필 사인

    # 56세에 효성물산 설립

    1962년 9월, 조홍제는 이병철과 동업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였다. 그때 조홍제는 56세였다. 나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의 56세와 1960년대 56세는 무엇이 다를까? 조홍제는 새로운 사업을 하여 성공하겠다는 의욕과 충만함은 더없이 높았다. 삼성에서 나와 첫 독자사업을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하였다. 하지만 욕심을 내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잘 살릴 수 있는 것을 첫 사업으로 구상하였다. 그것은 무역업이었다. 효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효성물산은 조홍제가 삼성물산에 근무할 당시 1957년 설립한 무역회사이다. 이 시기에 무역은 수출보다 수입이 많았던 시기로, 외국에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 달러가 필요하였다.

    정부는 1개의 기업에 얼마씩 배정을 하였다. 기업체 수에 비례하여 달러 배정이 되었는데 그 금액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따라서 많은 달러를 배정받기 위해서는 무역회사가 필요하였고, 효성물산도 이러한 제도 때문에 설립한 것이었다. 조홍제가 독립하면서 본인 명의의 효성물산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동양나이론 설립 당시 집무를 보고 있는 조홍제 회장.
    동양나이론 설립 당시 집무를 보고 있는 조홍제 회장.

    # 풍부한 경험을 축적한 엘리트 기업인

    조홍제는 이론과 실기를 모두 갖춘 기업인이다. 삼성무역, 제일제당, 제일모직 설립과 경영 등 당시 조홍제의 풍부한 경륜은 대한민국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조홍제가 설립한 효성물산의 성장은 고속철도만큼 빠르고, 안전하고, 탄탄하게 달렸다. 효성의 주력기업이 되는 동양나이론 공장 설립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한 배경에는 조홍제가 제일제당 사장으로 공장 건설과 기업 경영을 하면서 쌓은 풍부한 경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1966년 11월 18일 한국일보에 게재된 동양나이론 주식회사 설립공고.
    1966년 11월 18일 한국일보에 게재된 동양나이론 주식회사 설립공고.

    여기에 일본에서 독일경제를 공부한 기본지식과 미래를 예측하고 분석하는 탁월한 감각, 철저한 자기관리와 기업가 정신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조홍제의 더 큰 성공요인이 ‘유교 명문가의 자녀로 성장한 겸손, 버릴 줄 아는 욕심, 뒷 여운을 남기지 않는 깨끗함, 극복하려는 굳센 의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컴퓨터도 없던 시대, 1년 앞의 시장도 예측하기 힘든 시대에 10년 앞의 시장 변화를 예측하여 보고서를 만든 것은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타고난 감각의 결과이다.

    효성물산 기획팀에서 만든 각종 사업보고서.
    효성물산 기획팀에서 만든 각종 사업보고서.

    # 밀가루를 황금으로, 조선제분 경영

    부산에 있는 조선제분(현재 동아제분 부산공장)이 경영악화로 휴업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면 공장설립 후 생산까지 소요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기존 공장을 인수하여 바로 생산하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선제분을 1962년 9월 인수하였다.

    새로 짓는 것보다 1~2년 이상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시험 운전을 거쳐 바로 생산에 들어갔는데 마침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는 분식장려운동으로 소맥분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전국에서 대한제분 다음으로 많이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다.

    조선제분의 성공적인 정착은 효성의 다음 사업을 구상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이 되었다.

    1979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효성그룹을 대한민국 재계 5위의 대기업으로 지정했다.
    1979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효성그룹을 대한민국 재계 5위의 대기업으로 지정했다.

    # 돈을 밟고 다니다, 한국타이어 경영

    조홍제는 1962년 12월 한국타이어 제조주식회사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한국의 자동차는 이 회사 제품을 소화할 만큼 차량이 많지 않은 시기라 어려움을 겪었다. 조홍제는 멀리 보았고 예측을 하였다. 10년 후에는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질 것이고, 분명 한국도 자동차산업의 발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 경영에 참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1966년 7월 신진자동차 주식회사에서 코로나 승용차를 생산하였다. 1972년 전국에 고속도로가 놓이면서 자동차 수요는 물론 타이어 수요도 증가하여 한국타이어는 효성의 효자기업이 되었다.

    # 가죽만큼 튼튼하게, 대전피혁 경영

    대전피혁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대의 군화를 만들기 위해 세워졌다. 해방 후에는 정부 귀속재산이 되었다. 관리 부실로 산업은행이 1962년부터 이 회사 경영을 직접 맡으면서 대전피혁 공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삼성물산의 고철수집과 수출 주역이었던 조성제(조홍제 동생)가 일찍 삼성에서 나와 대전피혁공업을 불하받아 경영 중이었다. 경영 경험의 부족인지, 피혁시장의 악조건인지 경영회복이 되지 않았다.

    1965년 조홍제는 동생이 경영하기 어렵다는 기업을 거절하지 못하고 직접 참여하여 공장 현황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웠다. 그리고 대대적인 변화를 위해 능력이 검증된 새로운 경영진을 대전피혁 공장에 파견하였다. 직원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주입시키고 변화를 요구하였다.

    1967년이 되었다. 어느 직원은 “내가 대전피혁 입사 후 처음으로 보너스를 받았다”며 기뻐하였다. 하지만 조홍제 역시 여느 기업과 달리 대전피혁의 경영정상화에 무척 힘들었다고 회고하였다.


    조홍제의 한마디- 공장에도 명당터가 있다. 공장의 입지조건이 기업의 발전 속도를 좌우한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