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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돈- 김시탁(시인)

  • 기사입력 : 2022-01-05 20: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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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은 이게 없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세상이니 이것 앞에는 체면도 인격도 없다. 이것 가진 사람이 힘을 발휘하니 힘없는 사람은 이것을 위해 목을 매달고 산다. 죽는 시늉이 아니라 정말 죽기까지 한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내 몸의 일부나 전부도 판다. 이 세상에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눈다면 이것이 많은 사람과 없는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나눈다고 욕을 하면 이것 있는 사람은 그 따위 욕이 대수롭지 않지만 이게 없는 사람은 배알이 꼬이고 뒤틀린다. 이것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달달해서 쪽쪽 빨아 먹으며 살 수 있지만 이것이 없는 사람은 세상이 생지옥 같아서 궁핍을 끌어안고 굴욕과 뒹굴며 절망을 버적버적 씹으며 산다.

    세상이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거품을 무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것 있는 사람 쪽으로 팔이 굽고 열 손가락을 깨물면 이것 없는 손가락만 아프다. 그러니 눈만 뜨면 이걸 찾아 나서고 입만 열면 이걸 부르짖는다. 이게 많은 사람의 충고는 경청하게 되고 없는 사람의 충고는 그저 흘려들어도 되는 듯 여기니 같은 말이라도 무게와 근육이 다르다.

    태어나면서 가져오지도 않았고 죽으면서 가져갈 수도 없는 이것이 살다가 죽을 때까지 좌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젊어서는 이것을 위해 몸을 망치고 늙고 병들어서는 이것으로 망친 몸을 고쳐야 한다면 서글프지 않은가. 이게 뭐라고?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 데 하고 핏기 올리며 맨땅에 헤딩할 때가 돌이켜 보면 생의 가장 절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절정이야말로 정점을 찍을 때가 찰나와 같은 순간이 아니었던가. 이것이 없거나 부족한 환경에서의 삶은 늘 한기를 느끼니 온기가 있는 쪽으로 자꾸 고개가 돌아간다. 그러니 삶이 사는 것과 살아지는 것과 마지못해 살아 있는 것으로 구분돼 뿌리를 내린다. 뿌리가 다르게 뻗으니 자라는 생도 다르다. 땅심 좋은 토양에서 깊게 뿌리 내린 생은 잎도 무성하고 열매도 튼실해 비바람도 잘 견디지만 척박한 토양에서 겨우 살아남은 생은 허기지고 뒤틀려서 소슬 바람에도 흔들리고 가랑비에도 몸살 앓는다. 이것이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아주 괜찮은 도구이니 누군들 축적하고 싶지 않겠는가. 조금 있으면 더 가지고 싶고 더 가지면 다 가지고 싶어 안달인 것도 그 까닭이다. 그러나 운명이란 자동차의 핸들은 스스로 잡지 않는가. 비탈길도 신중을 기하면 무탈하게 벗어나고 신작로도 한눈을 팔면 마주 오는 트럭을 피하지 못해 비명 횡사한다. 방향과 방법이 다를지언정 갈 길이 있고 갈 만큼은 가야 하는데 그 어느 누구도 운명의 핸들을 대신 잡아줄 순 없다. 이것은 데리고 살기엔 편하지만 내 몸은 아니어서 내 심장과는 따로 떨어져 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데 이것인들 무엇하랴. 이것의 노예로 살기에 생은 너무 짧고. 가져 갈 수도 없는 이것 때문에 모든 걸 걸지 않아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김시탁(시인)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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