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6일 (화)
전체메뉴

[춘추칼럼] 배춧국과 동지 팥죽- 장석주(시인)

  • 기사입력 : 2021-12-23 19:59:47
  •   

  •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속절없이 지는 태양을 전송하자. 겨울은 태양조차 차갑다. 펄펄 끓던 여름의 야만적인 태양이 식은 지 오래다. 지나간 날은 끔찍했다. 레몽 끄노는 “악마들이 달군 게 태양”이라고 그랬지. 광기와 대의명분으로 태양이 극렬하던 시대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말똥 냄새가 나는 가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눈(눈)과 얼음, 소금과 후추, 양초 여섯 개를 위해 마련한 겨울 스웨터를 장롱에서 꺼내 입었다. 스웨터를 입으면 저녁의 스산함은 운명의 순간으로 빛난다. 겨울 황혼은 잘 구운 빵 같다. 그걸 보는 게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어쨌든 동생이 빵을 달라고 떼를 쓰지 않는 건 사실이다. 동생은 환절기마다 오는 우울증을 제 방식으로 잘 견디는 중이다. 가을이 끝날 무렵 우리에게 낙담이 찾아들었는데, 그건 뉴질랜드 산 마누카 꿀이 떨어진 탓이다. 그 대신 눈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산수유 빨간 열매들이 있음을 깨닫고 위안을 얻었다. 시들고 바스러지는 것들의 소리가 시끄러울 때 사소한 것에 상심한 기분은 함부로 방치된다. 한 해가 끝나는 것은 셰익스피어 400주기, 쓸모를 잃은 열쇠, 녹색 채소들, 일요일 저녁들, 빛나던 소녀의 미소가 주던 기쁨과 위안 없이 견딜 날들이 더 길어진다는 뜻이다.

    나는 겨울마다 눈 내리는 오슬로에 가고 싶었지. 오두막집에서 눈 내리는 숲을 오래 바라보고 싶었지. 가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가문비나무 어린 가지들이 뚝, 뚝 꺾이는 소리를 듣고 싶었지. 나는 평생 오슬로에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 오늘은 서리 맞은 저 들판의 한해살이풀들이 닳아빠진 무릎을 꺾고 주저앉은 풍경이나 바라볼 뿐이다. 겨울에는 구절초, 꿩의비름, 도라지, 다알리아의 전성시대도 끝난다. 당신도 더 이상 젊지 않다. 새해엔 당신의 얼굴에 주름이 늘고, 골밀도도 성겨질 것이다. 해가 지날수록 피의 고도(高度)가 낮아지고, 고아원의 복도에는 한기가 들어찰 것이다. 해마다 외양간에 매인 소는 몸집이 자라지만 어머니들은 조금씩 쇠약해진다. 어머니는 늙으신 뒤 부쩍 잠꼬대가 심하다. 사람이 늙으면 왜 어린 시절 꿈을 더 자주 꾸는 걸까?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장자리에 가랑잎이 쌓여 있다. 저 녹색의 시체들! 바람이 저들을 한데 모았을 테다. 파주 북쪽 하늘에는 쇠기러기들이 V자로 대오를 이룬 채 난다. 두어 마리가 그 대오에서 이탈한 채 뒤를 따른다. 아마도 날개 근육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새끼 쇠기러기일 것이다.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막내 동생을 생각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다. 낮엔 크루아상 하나를 아껴가며 먹고 해바라기의 회색 씨앗을 까먹으며, 그 많던 삼촌과 이모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한다. 오후 5시 무렵 이마가 차가워진다. 문득 겨울 낮은 짧고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일조량이 준만큼 행복도 준다. 점심에는 어머니가 끓인 배춧국을 먹는다. 배춧국은 슬픔을 달래주는 내 소울 푸드다. 어머니는 어쩌자고 그 맛있는 배춧국을 끓이셨을까? 나는 뜨거운 배춧국에 입을 데일까 후후 불면서 먹었지. 응달진 곳마다 추위가 가난한 집 자식들처럼 한데 모여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차갑고 청명한 겨울 저녁들이 더 자주 왔다가 간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는다. 동지 팥죽은 귀신을 내쫓고 집안에 닥칠 흉사를 막는다. 그러니 아코디언을 팔아서라도 동지 팥죽은 꼭 먹어야 한다. 어머니가 다시 젊어진다면, 내가 어머니의 어린 아들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머니에게 떼를 써서라도 털모자를 하나 얻어 쓰겠다. 그러면 폭설이 쏟아져도 머리가 젖지 않을 텐데. 사는 동안 너를 미워한 것을 후회한다. 나는 더 착한 아들이 될 수도 있었지. 아, 어머니가 끓인 배춧국과 동지 팥죽을 먹을 수만 있다면 나는 더 훌륭해지겠지. 하지만 그럴 순 없겠지? 그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겠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늙어버렸으니까.

    장석주(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