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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⑥ 동방지성을 만든 일본 유학

조국에 필요한 ‘동방의 별’ 되려 밤낮으로 공부했지만…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 기사입력 : 2021-12-10 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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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에서 퇴학생을 받아주는 곳이 없자 조홍제는 이 기회에 더 넓은 곳으로 가서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에는 입학 허가, 자격시험, 여권 발급 등 제약이 없어 경제력만 있으면 누구나 일본에 가서 공부할 수 있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중퇴생인 조홍제는 중등학교 졸업장이 없어 대학입학시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간도 용정중학교에서 발행한 가짜 졸업증명서를 제출하고 와세다공업전문학교 기계과에 시험을 보았다. 중앙고보 재학 시 성적이 우수하였던 조홍제는 쉽게 합격하였다. 기계 기초를 배우면서 다른 학문의 기초도 중요하리라 생각하고 일본대학 야간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또 입학을 하였다. 주간에는 전문학교 기계과 공대학생, 야간에는 전문부 정치경제과 학생으로 하루 10시간씩 수업을 받고 공부를 하였다.

    퇴학 후 일본 유학길 올라 전문학교서
    낮엔 기계과·밤엔 정치경제과 공부하며
    정규과정 호세이 대학 경제학부 입학

    친구들과 자취하는 집 ‘동성사’라 부르며
    경남 출신 유학생들과 4년간 공부 매진

    졸업 때 교수 대신 사업하려 귀향했지만
    아버지 반대로 사업 꿈 차단 당하며 좌절

    조홍제가 일본에서 자취한 곳과 비슷한 형태의 건물, 조홍제는 건물 벽에 동방명성, 입구에 동성사라 붙여 놓았다.
    조홍제가 일본에서 자취한 곳과 비슷한 형태의 건물, 조홍제는 건물 벽에 동방명성, 입구에 동성사라 붙여 놓았다.

    # 만학도 조홍제

    조홍제는 만학도였지만 공부가 싫증이 나지 않았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소질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일본의 유명대학 학부를 정식으로 졸업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조홍제가 입학한 일본대학 야간 전문부는 정식 과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홍제는 일본 겸창중학교 4학년에 다시 편입하여 중학과정을 끝낸 후 정규과정의 대학 입학 자격을 획득하였다.

    1929년 겸창중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이공학부에 응시하지만 불합격되었다. 시름에 빠져있던 중 지인으로부터 일본 호세이(법정)대학 경제학부는 독일경제학을 정통으로 공부할 수 있다고 소개를 받았다. 이공계가 아닌 경제학이었지만 흥미가 있을 것 같아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비로소 정규과정의 일본 대학생이 되었다.

    일본 호세이(법정)대학 독일경제학과 졸업 기념 친필 휘호. 붉은색 안이 조홍제 친필이다./조홍제회고록/
    일본 호세이(법정)대학 독일경제학과 졸업 기념 친필 휘호. 붉은색 안이 조홍제 친필이다./조홍제회고록/
    조홍제가 일본 유학시절부터 꿈꾸어 온 동방명성 친필 휘호./조홍제회고록/
    조홍제가 일본 유학시절부터 꿈꾸어 온 동방명성 친필 휘호./조홍제회고록/

    # 동방명성을 향한 일본 유학생활

    조홍제의 일본 유학생활 이야기이다. 조홍제는 집 한 채를 전세 내어 친구 4명과 함께 자취를 하였다. 조홍제는 함께 지내는 집 건물에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여기서 공부를 하고, 조국으로 돌아가 꼭 필요한 인재가 되자. 동방의 별 즉, 동방명성(東方明星)이란 자부심을 가지자”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에서 자취하는 집을 ‘동성사(東星舍)’로 하였다. 친구 간에 서로 뜻이 맞아 4년을 함께 보냈다.

    경남 출신 동경 유학생들은 일이 있을 때 마다 ‘동성사’에서 모임을 하면서 ‘동성사’는 자연스레 서부 경남 유학생회 본부격이 되었다.

    조홍제는 처음 동경에 유학을 와서 방을 구하지 못할 때 일시적으로 머물다 집을 구해 나가는 것에도 도움을 주는 등 후배들에게는 늘 큰형님 역할을 하였다. 조홍제 회고록에는 당시 일본에 유학 오는 학생은 네 가지로 분류되었다. 첫째, 독립운동을 위한 유학파 둘째,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자제들의 문학과 예술을 전공으로 하는 낭만파 셋째, 공부밖에 모르는 면학파 넷째, 고학파 등이다. 동성사는 면학파와 고학파의 산실이었다.

    일본 호세이(법정)대학 유학시절 조홍제. 우측 두 번째 중절모 쓴 사람./조홍제회고록/
    일본 호세이(법정)대학 유학시절 조홍제. 우측 두 번째 중절모 쓴 사람./조홍제회고록/

    # 일본 호세이(법정)대학 독일경제학부 입학

    당시 일본 호세이(법정)대학 경제학부는 일본 명문자제들이 많이 다녔고 일본 사회는 물론 학교에서도 조선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조홍제는 같은 학생이라도 나이가 5~6세 많았고, 교수도 조홍제를 격려하자 학생들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였다. 조홍제는 공부도 잘하였다. 일본에 사는 조선인 학생으로 일본인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공부뿐이었다. 조홍제는 학교에 다닐 때 일본 학생 모자를 쓰지 않았다. 4학년 때는 신사복에 중절모를 쓰고 다녔다. 스스로 동기보다 연장자이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이 시기 일본은 산업발달로 상업과 공업 등 산업계가 활성화되는 시점이었다. 상인도 우대를 받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대학을 마치고 나오면 판검사 시험을 보거나 관리, 교직 진출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일본에서 동고동락한 유학생과 함께 한 조홍제, 우측 첫 번째./조홍제회고록/
    일본에서 동고동락한 유학생과 함께 한 조홍제, 우측 첫 번째./조홍제회고록/

    # 졸업, 교수냐 사업이냐

    양반 집안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시기이다.

    4학년 졸업 시기가 다가오자 조홍제의 지도교수는 학문적 능력과 성적을 고려하여 대학원 진학 후 교수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조홍제는 집안에 경제적 여유도 있어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교수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그러나 계속 공부를 할 경우 일본에 더 머물러야 하고 고향을 장기간 떠나 있어야 하기에 장손의 책임과 역할 등으로 결국 교수의 길을 포기한다.

    일본은 특히 상공 분야가 발달되었다. 조홍제 자신도 경제학을 배웠고 종조부께서 말씀하신 “부지런히 치산에 힘쓰다 보면, 언제 무슨 큰일을 하고자 할 때, 그 일을 해 내는데 큰 도움을 주리라”는 가르침이 떠올라 학자의 길보다 실업계로 나가기로 결심을 한다. 그러나 졸업 후 고향에 돌아온 조홍제에게 아버지는 “너는 장손으로 고향에서 일을 하여라. 서울까지 먼 곳은 안된다” 하시면서 사업에 대한 꿈을 원천 차단시켜 버렸다.

    # 수학천재 조홍제의 성냥개비 계산법

    조홍제의 경영 중 특이한 방식 3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성냥회계 경영이다. 조홍제는 중앙고보 다닐 때 수학을 아주 잘하였다. 그래서인지 조홍제의 수학계산법은 특이하다. 조홍제식 계산경영, 계수경영이 있는데, 계산기나 주판을 사용하지 않고 성냥개비로 계산을 한다. 본인만이 연구한 것으로 머릿속에는 주판을 연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성냥개비를 이리저리 옮겨 꽂으면서 계산을 한다. 천만 단위 숫자를 계산한 후 직원들이 혹 틀리지 않았을까 의심스러워 전자계산기로 다시 확인을 해봐도 단 한번도 틀린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는 숫자회계 경영이다. 회사에서 회계 보고는 늘 골치아픈 보고 중 하나이다. 조홍제는 회사의 중요한 결재를 할 때 모든 것을 숫자 중심으로 정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신규사업에 진출할 때도 중간에 발생하는 변수까지도 숫자로 산정하도록 하였다. 조홍제는 회계사를 능가하는 숫자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유회계 경영이다. 효성을 대한민국 대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은 ‘동양나이론’이 탄생하기까지 많은 이야기가 있다. 조홍제는 공학과 경제학 전공의 엘리트 10여명을 뽑아 기획부를 조직하고 국내외 경제와 주요 유망 업종의 흐름을 분석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린 결과 ‘동양나이론’이 탄생되었다. 이런 직원들의 노력이 모여 창업 10년 만인 1970년대 24개의 계열사를 가진 국내 재벌 순위 5위가 되었다.

    <조홍제의 한마디> 근검 절약하고, 규칙생활만이 최고의 수익이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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