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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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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웅천 가마터에서 - 허숙영 (수필가)

  • 기사입력 : 2021-12-02 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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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마터는 아늑한 산속에 세로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자그마한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햇볕을 쬐며 고요 속에 잠겨있다. 난세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걸까. 아니면 가끔씩 찾아드는 현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까.

    조선시대 경남 기념물 160호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웅천 도요지는 조선전기에 분청사기를 주로 제작했던 가마터다. 가파른 자연경사면을 이용해 만든 오름 가마라 불이 쉽게 뒤쪽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릇을 쌓아놓고 굽는 번조실이 하나로 통하는 단실요 형태다. 불기둥식과 계단식 바닥구조를 가져 조선전기 가마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웅천 도요지에서 출토된 것들은 대부분 소박하고 자연스런 색과 무늬의 사발이다. 솔이나 거친 풀로 만든 귀얄로 쓱쓱 쓸 듯이 스쳐간 백토 자국이 그 어떤 장식을 붙이거나 더한 것보다 자연스럽고 친근감이 느껴진다. 투박한 도공들의 아픔이 배겨있을 서민들의 막사발. 붓이라기엔 뭉툭하고 거친 질감의 귀얄과 딱 어울리지 않는가.

    빠른 손놀림으로 쓸어내린 무늬는 바람에 휘어지는 갈대인양 역동성이 느껴지고 또 때로는 바닷가의 연흔 같기도 해 손으로 쓸어보고 싶다. 불에 끓던 유약이 굳어 굽 주위에 매화피가 생성되어 금방이라도 매화가 벙글 것 같다.

    막사발이라는 것은 어떤 용도로든 막 써도 되는 그릇이 아닌가. 손에 익어 편해지면 보리밥도 퍼 담고 숭늉도 따라 마실 수 있다. 장식용이 아닌 실용성을 우선으로 두었을 그릇이기에 편하게 만들고 부담 없이 써왔다.

    이런 조선의 막사발을 일본인들이 좋아한다니 의외다. 매끈하고 화려한 것이 일본그릇 아닌가. 인위적인 것에 싫증나 자연스러운 막사발이 눈에 들었을까. 일본에서 보물로 대접받는 이도와 비슷한 형태의 막사발이 이곳에서도 출토되었다. 오오이도의 평가기준을 삼는 특색은 일곱 가지다. 그릇면의 물레질 자국. 죽절 굽. 굽 중앙의 꼭지. 비파 색 유약. 전체시유. 굽 주위의 매화피, 그릇 내저면의 굽 받침자국이다.

    이런 것들은 직접 물레를 돌리고 손으로 빚어 산속 가마터에 넣어 구워야 생겨나는 자연스런 현상들이다. 가마터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오롯이 자연을 담은 그릇이다. 거기에는 빙글빙글 도는 물레에서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오로지 손바닥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 쓰다듬어야 하는 인내심이 들어있다. 몇날 며칠을 깊은 산중 가마 앞에서 눈한 번 붙이지 못하고 불 조절을 해야 하는 도공의 간절함이 녹아있다. 물아일체의 순간이 있다. 거기다가 바람소리까지 새겨 넣은 귀얄이 쓸어내는 힘 조절도 필요하다. 뜨거운 불에 흘러내린 땀방울이 맺혀있고 손끝 야무지게 마무리된 흔적인 굽 중앙꼭지가 있다. 언틀먼틀한 바닥면과 도자기를 한 몸처럼 만들어 가장 안전하고 편하게 받쳐 든 도지미의 희생도 있다. 온갖 이야기가 기록된 막사발이야말로 최고의 명작 대열에 설만하다.

    나도 막사발 하나 만드는 체험을 위해 물레 앞에 앉으니 사뭇 긴장된다. 흙 반죽이 너무나 부드러워 잠시 딴생각을 하다 손가락하나 잘못 스치기만 해도 어그러져 버린다. 자연염료로 색을 입히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생각대로 되지 않아 자발없이 덧칠을 한다.

    막사발이 완성되면 힘든 시대 보내느라 애쓰는 이들에게 연두 빛 봄을 들어앉힌 말차 한 잔 건네고 싶다.

    허숙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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