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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④ 대식 선생 조홍제, 신학문에 눈 뜨다

밥 잘 먹는 ‘대식 선생’ 신학문 열망도 소복소복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 기사입력 : 2021-11-25 2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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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홍제의 회고록 중 장가가는 이야기는 1920~1930년대 우리 농촌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풍습 교과서 같다. 1906년 5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마을에서 태어난 조홍제가 1921년 16살이 되던 해였다. 사립장을 한 노인 한 분이 조홍제의 집에 들러 조홍제 머리 둘레를 재어 갔다. 영문을 몰라 이웃에 장가 간 선배에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 “어허 홍제, 장가가는 모양이구나. 머리둘레를 재어 간 것은 망건을 만들려는 거여. 그 망건 위에 초립을 쓰는 거지.” 조홍제의 어머니는 시간날 때 마다 아들을 불러 처가댁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오늘날 표현으로 예비 신랑수업을 한 것이다.

    조홍제 창업주의 처가댁 진주 지수면 사곡리 고택, 지금은 잡초만 우거져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이래호/
    조홍제 창업주의 처가댁 진주 지수면 사곡리 고택, 지금은 잡초만 우거져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이래호/

    # 진주시 수곡면으로 장가가다

    조홍제의 처가댁(하씨)은 신학문을 한 개화 집안으로 진양군(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의 2000석 갑부였다. 신부는 조홍제보다 1살 많았다. 16살 조홍제가 초여름에 초립을 쓰고 군북에서 신부가 있는 진주 수곡면 사곡마을까지 4인교 즉, 네 사람이 들고 가는 가마를 타고 장가를 갔다. 조홍제와 조부가 탄 가마, 예물을 실은 마필이 따르고 그 뒤 하인들이 한짐씩 짊어지고 150리길을 걸어서 갔다. 부잣집 결혼이고 소문이 난 까닭에 중간 중간 동네를 지날 때마다 조부의 지인들이 나와 인사를 하는 등 그야말로 대 장관을 이루었다.

    조홍제가 신방에 들어가자 방문에 수십여개의 구멍이 뚫리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풍경은 아주 먼 옛날 이야기인 것 같지만 조홍제의 실제 장가간 풍경이다. 둘쨋날은 ‘남의 집 귀한 막내 규수를 훔치러 왔다는 도둑’이라 하여 하씨문중 젊은 친척들에 의해 초례청의 대들보에 매달리는 행사가 있었지만 손위 처남덕에 피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손위 처남 하영진은 신문물을 접한 견문이 넓은 분으로 인촌 김성수와 막역한 사이였다. 현재 수곡면 사곡리에 거주하는 하영진의 친척은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 나오는 신지식인 하영근의 실제 모델이 하영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영진은 수곡면 모곡초등학교 설립 후원, 진주 일신여고(현 진주여고) 건립 후원 등의 활동을 한 존경받는 지역 인사”라고 설명해 주었다. 조홍제 역시 처남 하영진을 ‘젊은 날 스승이자 좋은 형’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조홍제가 훗날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곳 교장이 처남의 친구인 인촌 김성수이다.

    당시에는 장가를 간 후 일정 기간 각자의 집에서 생활한 후 신부집으로 가는 풍습이 있었다. 조홍제도 이 풍습에 따라 다시 처가댁으로 가다가 뜻하지 않게 ‘마마’에 걸렸다. 약 한달 동안 처가댁에서 장모의 지극한 정성으로 완치되었다. 한달 여 병 치료를 하는 동안 처가댁 가족과 주변 지인을 만나 대화하면서 신학문에 대해 알게 되었고 진료차 인접한 큰 도시 진주를 보면서 도시 문화에 대한 동경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조홍제도 스스로 농촌에서의 생활이 너무 답답하다는 느낌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시기이다.

    처남 하영진이 진주 일신여고 설립에 후원했다는 기사가 실린 1937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이래호/
    처남 하영진이 진주 일신여고 설립에 후원했다는 기사가 실린 1937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이래호/

    # 좌절된 신학문 공부

    조홍제가 장가가기 전 13살 전후의 일이다. 조홍제 아버지가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의견을 조부에게 자주 피력하였지만 조부는 장손인 조홍제는 신학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홍제 부친도 이 일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마을 친구들이 신식학교에 다니기 위해 도시로, 서울로 떠나갔다. 주말이나 방학 때 만나는 친구들도 신식학교에 가자고 권유하는 등 조홍제의 신학문에 대한 열의는 더 높아갔다. 그때 조홍제는 단식을 하면 할아버지가 허락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단식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과는 할아버지의 노여움을 더 받게 되고 4일 동안의 단식은 싱겁게 끝났다. 결혼 후 조홍제가 처남 하영진과 처가댁을 통해 알게 된 신학문과 개화사상에 대한 열의로 신학문을 배우고 싶었지만 조부의 허락없이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신학문 열의 높았던 13살 소년 조홍제
    단식으로 허락 구했지만 조부 노여움만 사

    16살에 초립 쓰고 가마 타고 장가 가
    진주 처가는 신학문을 한 개화집안인데다
    서울 구경 후 신학문 집착 더 강해져

    한끼 3그릇씩 먹어 ‘대식 선생’으로 불려
    일본 유학 당시 자취할 때도 ‘밥심’ 발휘

    # 넓은 세상 서울을 보고

    어느 날 숙부가 서울에 가서 넓은 세상을 보고 오는 것을 조부로부터 허락을 받아 왔다. 조부는 조건을 달았다. “네가 서울로 가게 되면 고향 친구들을 만날 것인데, 네 상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절대로 단발을 해서는 안된다. 상투만 온전하게 잘 보존하고 서울 구경을 하거라.”

    조홍제는 한달가량 서울 구경을 계획하고 두둑한 여비를 챙겨서 안국동에서 하숙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서울에 구경 온 조홍제를 맞이한 고향 친구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서울 시내 안내도 해주었다. 또 밤늦게까지 하숙하는 친구들을 모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조홍제는 한창 성장할 친구들이 하숙집 밥이 적어 고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근에 하숙하는 친구들을 불러내어 당시 청요리를 잘하는 고급 식당에 데려가 푸짐하게 식사를 대접하였다. 식사 도중 친구 한 명이 숨겨온 가위로 조홍제 모르게 상투를 자르려고 시도하여 상투 일부가 잘려 나가는 사태가 발생한다. 조부와 약속한 일인데 근심 가득하고 혼이 나간 조홍제는 다음날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조홍제는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세상이 아주 넓다는 것을 알았다. 고향에 돌아오니 숙부님은 “그대로 서울에 눌러앉아 학교에 가지 왜 다시 내려왔냐, 고지식하다”고 꾸중을 하였다. 뒤늦게 숙부의 말씀을 이해하였지만 조부와의 약속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서울의 화려함을 가슴속에 담고 온 조홍제의 심장은 매일 매일 활기차게 뛰어도 함안에서 달리 선택할 것이 없어 서당 문창재를 오고 가는 일상으로 세월을 보냈다. 조홍제의 서울 견학은 가슴을 흔들어 놓았고 신학문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해져 갔다.

    # 대식선생 조홍제

    조홍제는 어려서부터 남과 달리 식사량이 많아 서당에서 ‘대식 선생’이라는 귀여운 애칭을 가졌다.
    조홍제는 어려서부터 남과 달리 식사량이 많아 서당에서 ‘대식 선생’이라는 귀여운 애칭을 가졌다.

    조홍제는 대식가다. 15살의 나이가 되자 하루 식사량이 한끼에 3그릇씩이나 됐다. 그래서 서당에 공부하던 친구들이 ‘대식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 조홍제는 시골 서당에서 다니던 때의 대식병이 또 발생하였다. 하숙집에서 조금 주는 밥 때문에 늘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한때는 밥 많이 주는 하숙집만 찾아서 옮기기도 하였다.

    1924년 조홍제가 서울에서 하숙할 때 한달 비용은 월 16원이었다. 당시 벼 한가마 값이 5원5십전, 한달에 쌀 세 가마 값을 주는데 밥은 언제나 조홍제의 식사량에 절반도 되지 않아 부잣집 아들이 배고픈 고생 아닌 고생을 하였다.

    조홍제가 어린 시절 공부한 당시의 서당 풍경./조홍제 회고록/
    조홍제가 어린 시절 공부한 당시의 서당 풍경./조홍제 회고록/

    일본 동경 법정대학(호세이대학) 유학 중에도 조홍제는 음식으로부터 자유를 찾지 못하고 친구와 함께 집을 하나 빌려 자취를 하였다. 빌린 집에 방이 여러 개가 있어 고향 친구들을 불러와 고향에서 가져온 된장, 고추장으로 직접 김치를 담가 먹기도 하면서 한국인의 밥심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이렇게 친구들과 함께 지낸 집을 동방의 별(東方之星)이 되기 위해 모인 집이란 뜻으로 ‘동성사(東星舍)’라 하였다. 하숙(下宿)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가장 낮은 등급의 숙박업소이다. 방값과 식대를 지불하고 장기간 남의 집에 숙박하는 행위를 말한다. 하숙의 등장은 1920년대 초 도시의 발달과 함께 증가하였다. 하숙보다 높은 대우를 해주는 중숙과 상숙은 왜 없었는지 궁금하다.

    <조홍제의 한마디> 꿋꿋하지 못하면 욕됨이 있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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