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경남시론] 이웃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정성헌(경남대 법학과 교수)

  • 기사입력 : 2021-11-21 20:23:09
  •   

  • 층간소음 문제가 연일 화두다. 시끄러운 이웃, 특히 위층에 발생하는 소음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언론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들려온다. 반대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종종 듣게 된다. 충분히 조심하고 조용하고 있음에도 아래층에서 과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최근에는 적지 않은 듯하다. 너무 예민하고 잦은 반응에 위층에 사는데도 불구하고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추석 연휴가 막 끝난 지난 9월에는 층간 소음으로 인한 갈등으로 아래층에 사는 30대가 위층에 사는 40대 부부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여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국민의 상당수가 아파트라는 공동 주택에서 사는 우리에게 층간 소음은 더 이상 특이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소음이 주거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층간 소음이 살인, 상해와 같은 범죄로 이어진다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는 지나치게 시끄러운 위층으로 인해,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예민한 아래층으로 인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지나친 소음은 타인의 주거 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소음을 멈춰줄 것을, 더 나아가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배상해 줄 것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도 법에 의해서 인정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모든 소음에 대해서 위와 같은 법적 해결 방안이 동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한 소음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법은 사람이 통상적으로 살아가는데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도의 소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법적 구제책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경우는 발생하는 소음에 대해서 참을 수밖에 없다. 벽 하나를 끼고 이웃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한쪽이 소음으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만큼 다른 쪽이 일상생활은 가능하도록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가 그 기준이냐를 두고 법에서는 ‘수인한도’라는 표현을 쓴다. 말 그대로 참을 수 있는 한도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 수인한도가 어느 정도인지, 즉 소음이 수인한도를 넘은 것인지 아닌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소음이 듣는 사람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기에, 실무에서는 특정한 상황에 맞추어 소음의 정도를 나타내는 데시벨(db)로 그 수치를 미리 정해두기도 한다. 통상 일상생활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도의 소음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일상생활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 드릴로 벽을 뚫는 것과 같은 소음은 일상적인 범위를 훨씬 넘어선 것이지만, 몇 년에 한 번 집을 수리할 때 발생하는 짧은 기간 동안의 소음은 일상적인 범위를 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집수리 같은 건 영원히 못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층간 소음을 정당하다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공동체 생활의 기본이다. 가끔 내 집인데 내 마음대로 못하냐고 하기도 하지만, 피해를 끼쳐도 되는 자유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생활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소음이 발생될 수밖에 없음도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소음을 통해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의 소음은 참아주는 것도 이웃의 일상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 점은 법에 의해서도 확인되는 부분이다. 어느 영역에서든 그렇듯, 법은 어느 한쪽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익을 모두 고려하여 모두를 공존시킬 수 있는 선에서 기준을 제시한다. 이를 법에서는 ‘수인한도’라는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면서 행동한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데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해와 배려는 법에서도 전제되고 있다. 법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이는 당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흔히 분쟁의 절정에서 사람들은 ‘법대로 하자’고 한다. 그런데 사실 법의 목적은 ‘파국’이 아니라 ‘공존’이다. 법대로 하자는 것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존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정성헌(경남대 법학과 교수)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