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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③ 조홍제와 한학 이야기

엄격한 유교 가풍 아래 머리 땋고 한학 공부하던 소년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 기사입력 : 2021-11-19 08: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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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홍제의 종조부가 유생들과 강담을 나눈 양심정. 현재 군북역 앞에 있다./이래호/
    조홍제의 종조부가 유생들과 강담을 나눈 양심정. 현재 군북역 앞에 있다./이래호/

    추노지향(鄒魯之鄕)은 맹자가 추(鄒)나라 사람이고, 공자가 노(魯)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지만 학문을 숭상하고 예의를 지키는 고장을 의미한다. 이 표현을 함안군에 적용시켜도 어색하지 않다. 중국 ‘논어’에 ‘백이와 숙제’라는 말이 나온다.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어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채취하여 먹었는데, 그것 역시 ‘주나라 땅의 나물이다’ 하여 결국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백이와 숙제’는 중국 고대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군주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킨 의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함안에도 그 전설을 간직한 백이산과 숙제산이 실제로 있다. 앞서 이야기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를 추모하기 위하여 동네에 있는 ‘서산’을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이라고 하였고, 앞에 봉우리를 숙제봉이라 불렀다.


    함안 군북면 천석꾼 독립운동가 집안 출생

    당대 대학자 종조부의 수제자가 글 가르쳐

    신식학교 대신 문창재에 차린 서당서 공부

    별당 ‘양심정’에선 유생 모임 수시로 열려

    알려진 것과 달리 진주 지수초 다닌적 없어


    # 함안군과 유교 문화

    허권수 교수의 저서 ‘경남지역 유교 문화의 형성과 전개’에 기록된 함안과 관련된 내용이다. 1517년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은 함안군의 풍속을 이렇게 평가했다. “함안은 검소하고 진솔함을 숭상하였다. 선비는 예법과 의리를 사모하고 백성들은 농업과 뽕나무 가꾸기에 힘쓰고 아울러 물고기와 소금도 판다” 하였다. 또한 “함안은 산수가 아름답고 인물이 많이 나고 산물이 풍성한 환경 속에서 거주하며, 함안 군민들은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다해 풍성하게 차린다. 그리고 손님이나 벗들의 접대를 잘하고 이름 있는 집안에서는 조상을 위한 정자나 재실도 많이 건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유교 문화의 꽃을 피워 함안은 조선시대 내내 문화가 우수하고 학문 활동이 왕성한 곳”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함안지역 대표적인 유교 문화로 서원이 많이 세워졌는데 그 대표적인 서원이 어계 ‘조려’를 모신 ‘서산서원’이다.

    # 조홍제 집안의 독립운동

    조홍제는 추노지향의 으뜸, 함안군 군북면 유교가 가풍인 천석꾼의 집에서 태어났다. 조홍제의 글(한자)공부 선생은 종조부 서천 조정규의 수제자였다.

    종조부 서천은 영남 일원 당대의 대학자로, 많은 문하생을 두었다. 이 수제자가 조홍제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오늘날 가정교사이다.

    서천 조정규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 비보를 듣고 나라에 아무런 보탬이 없어 망국의 한을 자초한 유생의 한사람으로 스스로 괴로워하였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였다고 비탄에만 젖어 있지 말고 스스로 힘을 키워야(민족자강) 한다고 생각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중국 심양으로 가서 고려촌을 세워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자”고 주장하였다.

    조홍제는 8살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종조부를 전송하던 그 광경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하였다. 종조부는 조홍제의 조부인 동생 조중규에게 “아우는 격물치지의 도가 출중하니 여기에 남아서 치산에 힘쓰라” 하였다.

    조중규는 형의 분부대로 근검절약하여 집안의 농토를 만석꾼의 수준으로 넓혔다.

    조홍제·구인회·이병철이 진주 지수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라고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홍제는 지수초에 다닌 적이 없고, 이병철은 3학년 1학기만 다녔을 뿐 졸업생이 아니다. 사진은 현재 지수초등학교.
    조홍제·구인회·이병철이 진주 지수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라고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홍제는 지수초에 다닌 적이 없고, 이병철은 3학년 1학기만 다녔을 뿐 졸업생이 아니다. 사진은 현재 지수초등학교.

    # 조홍제의 한학 공부

    1916년경 조홍제 나이 11세 전후, 그동안 서당에서 교육을 받던 조홍제가 신식 보통학교에 가도 될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조부는 조홍제를 신식 학교에 보내 왜놈 글을 배우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강고하게 유학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조홍제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땋고 문창재에 차린 서당에서 ‘중용’ 책장을 펼치며 한학을 공부하였다.

    조홍제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위해 본채 옆에 ‘양심정’이란 별당을 지어 드렸다. 이곳에는 종조부 서천의 벗과 조부의 문우 등 영남 각지에서 찾아오는 유생들의 모임 장소이자 강담이 수시로 개최되었다. 이렇듯 조부 주변에는 늘 당대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마을과 나라를 걱정하고 얘기하며 지역 어른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조홍제 아버지 조용돈에게도 끊임없이 신지식인들이 찾아와 학문과 나랏일을 걱정하고 토론하였다. 아버지는 찾아온 이들을 조금도 소홀히 대접하지 않으셨다고 회고하였다.

    조선시대 유학 교육은 그 자체가 생활의 규범이다. 백성들에게 올바른 도덕과 윤리를 알도록 교육 문화와 정신 문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서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되어 온 사립 초등교육기관으로 지방에서 초급단계 교육을 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지방에서 가장 활성화되었으며 선비부터 평민 자제까지 누구나 다닐 수 있었다. 당시 공립교육기관인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나이의 8~9세는 물론 15~16세에 이르는 성인이나 결혼을 한 사람들도 찾아오는 유학 도장이었다. 서당에서 배우는 과목은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 소학, 시경, 서경, 역경, 사기, 당송문, 당률 등이 있다. 이는 사학이나 향교의 예비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한학을 공부하는 순서는 소학을 먼저 읽고 논어와 맹자, 그후 중용과 대학 순서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지수초등학교 : 조홍제 다닌 적 없고, 이병철은 졸업하지 않아

    세 사람의 창업주 이야기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것이 학력 관계였다. 특히 조홍제와 이병철의 진주 지수초등학교 1회 졸업 여부가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과 다름이 있어 정리해 보았다. 학교에 다닌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졸업장이나 학적부가 증명을 한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지 않은 근거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그시기에 다른 학교에 다녔다는 증명을 하면 된다. 이 방법 역시 100년 전 일제강점기의 일이라 사실을 증명할 자료가 부족하다. 현실적으로 참 어렵다. 하지만 세 사람의 연대기를 세세하게 추적한 결과 학력과 관련한 몇 가지는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취재 결과 내용이다.

    조홍제가 진주 지수초등학교를 다닌 근거나 증명자료는 단 하나도 없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 조홍제는 지수초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여러 가지 근거가 있지만 지면 관계상 하나를 소개하면 함안 군북면 집 앞에 군북초등학교가 지수초등학교보다 먼저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생을 진주 지수면까지 유학을 보낼 이유도 없었다. 군북에서 지수까지 교통도 불편하여 통학이 불가능하였다. 이병철은 서당 공부를 끝내고 1922년 지수초등학교 3학년 과정에 편입하면서 처음으로 신식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3학년 1학기만 다니고 서울로 전학을 갔기 때문에 지수초등학교 졸업생이 아니다. 계속 다녔다면 구인회와 동기생으로 1회 졸업생이 된다. 이전 진주 지수초등학교 교정에 심은 소나무 이야기를 비롯 많은 언론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인회, 이병철, 조홍제의 지수초등학교 1회 졸업 이야기는 오류이다. 오늘부터 사실관계가 바로 정리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바람이다.

    조홍제의 한마디= 수행이 중요하니 '소학'을 공부하여 날로 새로워지길 바라노라

    이명용 기자 my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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