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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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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지름길의 추억- 문장복((사)한국전통온열문화원 총재)

  • 기사입력 : 2021-11-04 20: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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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레 실오라기 풀어지듯 봄부터 내리던 햇살이 중심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가속이 붙고, 따가운 볕이 되어 탈수하 듯 숲에 깃든 녹음을 훑어낸다. 산과 들, 길섶의 풀꽃들조차도 자라던 키를 일제히 멈추고 빚어낼 제 모양, 제 색깔 다듬기에 들어갔다. 곧 떠나보내게 될 가을의 뒷자락에 펼쳐 놓을 추수마당의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양명한 대기를 가르며 뭇 벌레 소리 현을 키 듯 들려나고, 나팔꽃 색감과 강의 물빛도 벼랑길을 예감하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더한층 긴장된 정적을 빚어낸다.

    강변 늪 둔덕에는 군데군데 유채의 환한 웃음을 딛고 억새가 우거져 뭉게구름처럼 떠 있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결에 갈대꽃이 첫눈 내리듯 나부낀다. 오랜만에 찾은 강변의 장미 길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다. 엷은 꽃잎을 돌돌 말아 현기증을 일으키던 넝쿨장미나 육중한 체구를 자랑하던 흑장미도 왜소한 꽃송이 몇을 힘겹게 받쳐 든 채, 일흔을 바라보는 내 척추처럼 서 있다. 유독 연꽃 모양의 장미(Black lady)만이 가장자리가 땡볕에 그을려 검은 테를 두른 듯하다.

    막 역을 떠난 열차가 강변을 돌아 애벌레 고치 뚫듯 터널을 빠져나간다. 60년대쯤만 해도 우리나라 길의 중심이자 모든 길의 지름길은 철도였다. 경부선 철도 곁에 살던 우리네 등굣길도 철길이 지름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철둑길을 따라 등교하던 날, 뒤에 처져 따라오던 친구가 “와~ 꽃 봐라!” 하는 소리를 남겼고 간발의 차로 우리는 레일 밖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그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따라 행동이 굼뜨고 비실거렸던 그 친구가 며칠째 끼니가 없어 굶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렇다. 가난이 죽음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 때가 있었다. 검붉은 장미꽃 앞에서면, 보리깜부기로 치장한 듯한 인디언 추장의 얼굴이 그려지고, 그 모습을 닮은 재건호란 이름 붙은 기차가 떠오른다. 그리고 열차가 레일 이음새를 밟고 지날 때에 내는 기괴한 음률이 ‘돌체 폰테스(Dulce Pontes)’의 파두음악 ‘그 바다와 당신’ 속의 북소리처럼 ‘꽃봐라~ 꽃봐라~’ 귓전을 울리고, 내 가슴은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뜀박질을 한다.

    문장복((사)한국전통온열문화원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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