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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18·끝) 73세 이병철 회장의 도전

[1부]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18·끝) 73세 이병철 회장의 도전
일흔셋 이병철의 도전, 반도체에 삼성 걸었다

  • 기사입력 : 2021-10-29 08: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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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상을 해본다. 때는 1934년, 장소는 마산 협동정미소안, 이병철이 주판을 들고 셈을 하고 있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87년이 흘렀다. 삼성전자에서 만든 휴대전화기에 엄지, 검지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두드려 보니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전화기 화면에 나타난다.

    2021년, 삼성전자의 위상은 세계 제일이다.

    삼성그룹이 세계의 기업으로 진입한 계기는 전자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1969년에 설립한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와 함께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경영학자도 있다. 일본은 1950년대 후반 정부의 중점 육성사업으로 석유화학과 전자산업을 지정했다. 이에 반해 한국은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일반인에게 ‘전자’라는 단어는 생소한 명칭이었다. 정부기관의 조직도도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여 전기공업, 전기기계공업이라 하였다. 일본의 전자산업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1969년 비로소 한국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되면서 기계, 철강, 조선 화학, 섬유, 에너지와 함께 전자산업도 한 축이 되어 국가경제정책의 중심으로 발돋움했다. 1969년 10월, 제1회 한국전자전람회가 덕수궁 옆 국립공보관자리에서 8일간 개최되었고 흑백 TV, 라디오, 스피커 등이 전시됐다. 대통령이 참석하여 테이프를 커팅할 정도로 정부의 관심이 많은 산업이었다.

    이병철이 태어나고 자란 의령군 생가./의령군청/
    이병철이 태어나고 자란 의령군 생가./의령군청/
    소년시기 한자공부를 한 문산정./이래호/
    소년시기 한자공부를 한 문산정./이래호/

    # “이 회장, 미래를 기다리지 말고 만들어 보시오.”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 ‘소이부답’에 삼성전자 설립과 관련한 내용이 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종필에게 이병철 회장에게 중화학공업을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김종필은 대통령의 말씀을 이병철에게 전달한 후 대통령과 면담을 주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병철에게 “임자, 중화학공업이 필요하니 조선이나 자동차, 전자공업 중 하나를 해보시오”라고 하였다. 1967년 한국비료공장을 준공하고 국가에 헌납한 이병철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이병철은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의 환경이 변함에 따라 전자 관련 소비재 품목의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측했다. 전자공업을 선택한 이병철은 1969년 백색가전과 음향기기를 생산하는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12월에는 흑백 TV와 라디오 수상기를 제조 생산하는 삼성산요전기회사를 차례로 설립한다. 1975년에는 삼성전자 기업 공개를, 1977년에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반도체사업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전자 관련 소비재 품목 수요 예측하고
    1969년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 설립
    1977년 한국반도체 인수하며 기반 다진 후
    美 전자업체 현장 조사·시장 분석 등 거쳐
    1983년 반도체 사업 뛰어들기로 결심

    # 무너진 삼성의 자존심

    이병철에게 첨단산업기술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반도체’였다. 이병철은 “면적이 작고 지하자원도 풍부하지 않은 한국은 오직 제조와 수출주도 품목의 생산만이 한국경제의 버팀목이 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은 과감한 산업재편을 하여야 하고 첨단기술 산업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고 늘 머릿속에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79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재계 순위를 발표하였다.

    한국 재계 순위가 형성될 때부터 1위 자리를 지키던 삼성그룹이 현대그룹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호남석유 등 대형 중공업에 진출한 럭키그룹이 2위로 도약하고 삼성그룹은 3위로 발표되었다. 명예와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큰 결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될 위기를 느꼈다.

    1980년 봄, 이병철은 일본의 저명한 경제전문가 이나바히데조 박사로부터 반도체 생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요 내용은 앞으로 살 길은 반도체, 컴퓨터, 유전공학, 우주해양공학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라 하였다. 마음속 깊게 새겨 두었다. 1981년 9월, 이병철은 그룹 임원회의에서 삼성의 장래에 관해 자신의 견해와 경영관을 밝혔다. “앞으로 반도체와 컴퓨터에 삼성의 흥망을 걸겠다.”

    부자 기받기 상징 정암(솥바위)./의령군청/
    부자 기받기 상징 정암(솥바위)./의령군청/
    이병철이 처음으로 신식학교에 다닌 옛 진주 지수초등학교./지수초/
    이병철이 처음으로 신식학교에 다닌 옛 진주 지수초등학교./지수초/

    # 반도체 사업을 하자

    이병철은 반도체를 알기 위해 공부도 많이 했다. 1982년, 18년 만에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 주요산업 도시와 IBM, GE, HP 등 여러 전자업체의 현장을 찾아 직접 보았다. 국내에서도 전자산업 전문가들을 초청해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일본과 미국에서 나온 컴퓨터에 관한 자료는 구할 수 있을 만큼 구해서 읽었다.

    반도체를 이해하고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려고 구상을 하니 풀어나가야 할 과제도 많았다. 반도체는 워낙 세밀한 산업이다 보니 기술 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고 막대한 자원이 투자되어야 했다. 더구나 기술 개발속도가 무척 빨라 제품의 사이클이 짧은 것도 문제였다.

    이병철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만약 반도체 사업을 한다면, 고급두뇌는 어디서 데려올 것이며, 데려오지 못할 경우 어떻게 육성해야 하는 것일까? 또 공장부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그 건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공장설비에 드는 천문학적인 돈을 어떻게 조달해야 하는 것일까? 이병철만이 가진 메모경영과 경청경영을 작동시켰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2월 6일, 이병철은 도쿄의 오쿠라 호텔 505호실에서 메모지에 밑줄을 하나 하나 그어가고 있었다. 이병철이 반도체 사업을 결심하게 한 것은 단 세줄의 통계에 의한 것이었다. ‘철강은 t당 340달러, 석탄은 40달러, 알루미늄은 3400달러, 텔레비전은 2만1300달러의 부가가치가 있다, 그런데 반도체는 85억달러, 소프트웨어는 t당 426억달러의 부가가치가 있다’. 결심이 섰다. 반도체 관련 계획서를 만들도록 지시를 했다. 그리고 1983년 3월 15일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합니다!”

    이병철이 첫 사업을 시작한 창원 북마산지역 협동정미소터 주변(현재 검증 중)./이래호/
    이병철이 첫 사업을 시작한 창원 북마산지역 협동정미소터 주변(현재 검증 중)./이래호/
    이병철이 지수초 재학시 생활한 매형 허순구 고택./이래호/
    이병철이 지수초 재학시 생활한 매형 허순구 고택./이래호/

    #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연재를 마치며

    삼성그룹은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하였다? 삼성은 운도 좋았고 정부의 혜택도 많이 보았다? 필자의 한마디는 “결코 아니다.”

    해방의 혼란기, 6·25전쟁, 4·19, 5·16을 겪으면서, 또 에너지 파동과 물자절약, 오일파동으로 인한 생산이나 공급이 중단되었을 때 그 어려움과 영향으로 회사 전체가 위기에 직면한 적도 있었다. 당시 고난극복의 그 힘든 과정이 성공이라는 화려함에 묻혀 국민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정부가 하라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삼성은 어떤 사업이든 철저하게 분석하고 검토하는 초심을 잃지 않는 기업이었다.

    필자의 마무리 표현이다. ‘이병철에게는 오학(五學)’이 있다.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사전에 철저하게 분석하고 보완하는 예측학, 전문가의 소리를 늘 경청하는 경청학, 습관화된 메모학, 장보고를 학습한 리더경영학, 어려움이 있을 때 해결책을 구한 논어학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선대회장에게 물려받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에 ‘논어’라고 하였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은 할아버지로부터 ‘경청’을 선물로 받았다고 하였다.

    경남에 이병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6곳 정도 있다. 가장 중요한 곳이자 이병철이 최초로 사업을 한 마산협동정미소 터는 아직도 검증을 못하고 있다. 삼성 창업주의 경남 흔적과 이어서 연재될 효성그룹, LG그룹 창업주와 함께 경남의 또 다른 기(氣)받기 관광지가 되기를 기대하며 삼성편을 정리한다.

    <이병철의 한마디> 논어를 곁에 두고 읽어라. 간결한 말 속에 사상과 체험이 응축되어 있다.

    ※11월 5일부터는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편이 연재됩니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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