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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17) 이병철의 또 다른 기업이야기

[1부]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17) 이병철의 또 다른 기업이야기
1960년대 방송·신문·대학·백화점 흡수하며 폭풍 성장

  • 기사입력 : 2021-10-22 0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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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년 12월 3일 인천에 거주하는 김규환 교수가 ‘라디오 서울방송국’ 설치 허가를 정부로부터 최초로 받았다. 텔레비전 방송국은 1962년 12월 31일 김용우 전 국방장관이 체신부로부터 TV 방송허가를 받았다.

    라디오와 TV 두 회사 모두 재정이 어렵게 되자 이병철이 각각 인수를 하였다. 인수 초기에는 락희화학(현 LG그룹의 모태)의 구인회가 50% 지분을 출자하여 공동경영을 하였으나 1965년 8월 이후 이병철 단독으로 경영하였다.

    라디오 방송은 ‘서울방송주식회사’에서 1964년 5월 9일, 태평로 국회의사당 맞은편 안국화재보험 빌딩에서 라디오 서울(RCB) 개국 전파를 발송하였다.

    라디오·TV 인수 TBC동양방송으로 통합
    1964년 대구대학 인수했다 박정희에 양도
    이듬해 성균관대 인수 명문대로 성장시켜
    1963년 신세계백화점 전신인 동화百 인수
    1965년 중앙일보 창간·삼성문화재단 설립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는 이병철 회장./호암자전/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는 이병철 회장./호암자전/

    텔레비전 방송은 ‘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에서 1964년 12월 7일 첫 방송을 하였다. 그 후 1965년 8월 16일 라디오 방송은 중앙라디오(JBS)로, 텔레비전 방송은 중앙텔레비전(JBS TV)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그리고 1년 만인 1966년 8월 15일 라디오는 동양라디오(TBC)로, 텔레비전은 동양텔레비전(TBC TV)으로 다시 회사명을 변경하였다.

    삼성그룹 계열사 동양방송.
    삼성그룹 계열사 동양방송.

    두 회사는 1974년 TBC 동양방송으로 통합되어 운영되다가 1980년 11월 30일 언론 통폐합 때 국영방송 KBS에 흡수되었다.

    이에 앞서 삼성은 텔레비전 방송의 경우 컬러시대가 올 것에 대비하여 1979년부터 컬러 TV 브라운관도 개발 생산하였다. 1980년 12월, 정부는 컬러 TV 방송허가를 하였다.

    1965년 9월 22일자 중앙일보 창간호./이래호/
    1965년 9월 22일자 중앙일보 창간호./이래호/

    # 중앙일보 설립

    한국 사회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정치와 사회 혼란으로 경제에 파국적인 영향을 끼쳤다. 기업가는 기업을 창설하여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양질의 상품을 공급하여 국민소득을 늘린다. 기업이 성장하여 세금을 납부하면 정부 운영, 국가 방위의 뒷받침에 이바지한다. 경제인에게는 국가와 사회를 위한 막중한 사명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공헌을 무시하고 정부는 부정 축재자라는 오명까지 씌워버렸다. 이병철이 경제인의 힘이 미약함과 그 한계를 통감하여 정치가가 되려고 생각한 배경의 일부 내용이다.

    4·19와 5·16을 겪으면서 어려움을 보냈던 이병철이 단 한 번 정치를 생각했던 적이 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정치가 기업인을 부정 축재자로 구분할 때 갈등이 깊었다. 이병철은 정치의 목적은 국민을 잘 살게 하는 것이다.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는, 더 나아가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였다. 현실 참여의 정치보다 종합 매스컴 창설을 결심하였다. 기업가에게도 언론의 힘이 필요한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병철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을 운영하면서 국내 최대 종합매스컴 회사를 만들기 위해 1965년 9월 22일 중앙일보를 창간하였다.

    사장에는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홍진기를 임명하였다. 훗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인이 된다.

    이병철은 기업설립 시 즐겨 쓰던 삼성과 제일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신문사 이름을 ‘제일 크다’는 뜻이 담겨 있는 ‘중앙’이라 하였다. 중앙일보가 ‘사회의 공공그릇으로 큰 역할을 완수해 줄 것을 기원한다는 뜻’이다.

    삼성이 인수한 성균관대학교. 과거시험을 치렀던 비천당 뒤로 600주년 기념관이 보인다./이시원/
    삼성이 인수한 성균관대학교. 과거시험을 치렀던 비천당 뒤로 600주년 기념관이 보인다./이시원/

    # 삼성과 대학

    이병철은 기업 하나를 세우는 만큼 재단의 사회적 참여도 필요하다고 인식, 사회 공익을 위하여 1965년에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1971년에는 ‘삼성문화문고’를 설립하고 책을 간행하였다. 출판한 도서는 전국 고교와 대학도서관, 공공도서관에 무상으로 기증하는 등 도서 보급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대구는 삼성물산의 발상지이고 제일모직의 본공장이 있어 삼성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지방에도 좋은 대학을 키워 보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자금난으로 운영에 어려움이 있던 대구대학을 1964년에 인수하였다. 그러나 청구대학을 인수하여 종합대학 계획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구대학을 양도하였다. 1967년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통합하여 생긴 대학이 영남대학교이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의 철학이 확고하여 1965년 9월, 성균관대학교를 인수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학교는 반도체시스템공학과와 글로벌리더학부 등을 신설하여 글로벌 인재양성을 위한 국내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성장시켰다.

    1969년 발행한 신세계카드. 1996년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한국 첫 신용카드로 인정받았다./신세계백화점/
    1969년 발행한 신세계카드. 1996년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한국 첫 신용카드로 인정받았다./신세계백화점/

    # 신세계 백화점 카드

    1962년 9월 동화백화점은 동방생명에 소유권을 넘겼다. 하지만 동방생명도 경영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1963년 7월 삼성에 인수됨으로써 동화백화점 주식 100%의 경영권도 자연스럽게 삼성으로 인수되었다. 1963년 11월 삼성은 동화백화점 상호를 신세계 백화점으로 바꾸었다.

    1970년대 국민소득도 어느 정도 높아졌다. 재래시장에서 볼 수 없는 제품의 판매와 한 건물 내에서 쇼핑과 식사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백화점 같은 형태가 조금씩 생겨났다.

    한국의 백화점 사업도 꾸준히 성장하였다. 신세계 백화점은 196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최초로 신세계 백화점 카드를 발급하였다. 물물교환에서 조개껍데기 사용, 그리고 구리나 철로 된 동전, 지폐로 이어져 오던 지불 방법이 카드로 물건값을 계산하는 것은 일대 혁신이었다.

    가로 8.6㎝ x 세로 5.4㎝의 플라스틱에 새긴 이름과 회원번호만 가지고 물건을 주고 받는 새로운 결재 방식이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일부 임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고객카드였고, 소량으로 제작되었다. 신세계 백화점만 사용할 수 있는, 외상으로 물건을 먼저 주고 훗날 물건값을 지불하는 형태다. 지금의 카드와는 차이가 있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신용카드로 인정을 받았다. 지금은 누구나 카드 2~3개 정도는 소유하고 있으며 발급 자격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다. 1970년대 신용카드 발급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 김종필과 에버랜드

    김종필의 회고록 ‘소이부답’ 중 내용이다. 1971년 이병철이 김종필 국무총리를 찾아왔다. “미국의 디즈니랜드 같은 테마파크를 세우고자 하는데 경기도 용인쪽에 산림청 땅이 섞여 있어 매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총리께서 도와 주십시오.” 산림녹화가 국정 주요 과제라 산림청도 땅을 팔 수 없는 입장이었다.

    김종필 총리가 아이디어를 냈다. 삼성이 산림청 땅의 두 배쯤 되는 땅을 사서 용인 땅과 교환하도록 한 것이다. 산림청은 대토(代土)를 받고 삼성에 땅을 내줬다. 용인자연농원이 들어서고 훗날 ‘에버랜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국의 테마파크의 원조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삼성의 대표미술관 ‘리움미술관’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고 ‘호암미술관’은 이곳 에버랜드에 있다.

    <이병철의 한마디> 익자삼우 : 정직한 자, 미더운 자, 견문이 많은 자를 벗으로 하면 이익이 된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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