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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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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⑮ 4·19와 비료공장

[1부]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⑮ 4·19와 비료공장
정치적 혼란에도 ‘비료공장 건립 의지’ 꺾지 않았지만…

  • 기사입력 : 2021-10-08 0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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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모가 큰 기업을 여러 개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기업집단, 그룹, 또는 재벌기업이라고 한다. 재벌이라는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경제를 지배하던 대기업을 집단으로 지칭하는 표현이다.

    한국은 해방과 한국전쟁 후 과도기를 거쳐 1950년대 중반까지 국가가 소유나 권한을 가지고 있던 국유재산, 귀속재산, 원조물자배정, 정부발족사업 등을 민간기업에 이양했다. 이때 그 분야에 관련 있는 회사나 자본, 경영 능력이 되는 회사가 참여해 불하받은 후 막대한 이익을 창출한 기업가의 집단을 재벌이라고 했다. 정치와 경제가 유착하여 비정상으로 이루어진 형태로 보는 시각도 많았다. 국가는 경제정책을 통해 국민 복리를 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기에 1961년 5·16 이후 한국 사회는 삼성을 비롯 삼호, 개풍, 대한그룹 등 많은 재벌이 탄생됐다.

    이병철은 “나는 새로운 사업을 할 때 적극적이고 열의를 다한다.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 창조한다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였다.

    이병철은 사업의 구상, 분석, 경청, 기획, 실행, 완성 등의 단계별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 분야에 하늘이 준 남다른 재능과 감각을 갖고 있었다. 자료수집과 분석 그리고 학습 과정을 중요시하지만 이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전문가 의견을 듣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병철의 ‘경청론’이다. 전문가란 말 그대로 그 분야의 남다른 식견과 지식을 가진 전문인이기에 이병철은 전문가의 의견을 자주 듣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농업으로 경제 일으키려면 비료공장 필요”
    이승만 대통령에 계획 설명·차관 승인받아

    서독·이탈리아 차관 단숨에 성사시켰지만
    4·19로 정치적 혼란 겪자 미국 교섭 난항

    과도정부 시기 계열사 15곳 탈세혐의 조사
    비료공장 설립계획서 제출했지만 행방불명


    # 의령에서부터 꿈꾸던 비료공장

    85년 전 이병철은 아버지로부터 쌀 300석(섬)을 수확하는 규모의 농토를 고향 의령에서 받아 사업 밑천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수백만평의 농지를 소유하면서 농촌과 농업에 대한 관심도 가졌다.

    이병철은 “농업으로 경제를 일으키고, 농업으로 농촌과 농민을 위한 일을 하자. 그것은 비료공장을 한국에 설치해 우리 손으로 비료를 생산하는 것이다. 자급자족만이 우리 농촌의 가장 시급한 문제 해결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당시 비료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고, 원조자금에 의한 수입품목 중 가장 많은 금액을 차지했다. 1955년에 착공된 충주비료공장, 1958년에 착공된 나주비료공장 등이 있었지만 이 두 공장의 생산으로는 한국 농촌 비료사용의 1/10의 규모 밖에 되지 않았다.

    이병철이 생각하는 비료공장 생산 규모는 35만t으로 세계 최대규모 공장이었다. 비료공장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필요예산을 보고 받았다. 이 정도 규모의 공장이라면 대한민국 연간 원조금액의 1/5에 해당하는 5000만달러가 필요하였다. 이병철은 자력으로 비료공장 설립에 역부족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60년 4월 19일 계엄사령부 설치 공고에 친필 可晩이 보인다. 가(可)는 결재승인을, 만(晩)은 이승만의 끝이름이다./대통령기록관/
    1960년 4월 19일 계엄사령부 설치 공고에 친필 可晩이 보인다. 가(可)는 결재승인을, 만(晩)은 이승만의 끝이름이다./대통령기록관/
    이병철이 즐겨 쓴 휘호 ‘경청’./호암자전/
    이병철이 즐겨 쓴 휘호 ‘경청’./호암자전/

    # 한국비료 설립 계획서 정부에 제출

    이병철의 생각 속에는 한국에 비료공장을 세워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방법이 있을까하는 고민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1960년, 신정 연휴를 일본에서 보내고 있던 이병철은 특집 방송 경제전문가 좌담회를 시청하였다. “미국의 원조로 성장한 선진 국가는 GNP의 1%를 원조나 차관형태로 후진국에 제공하여 미국의 원조 부담을 분담해야 한다”는 내용이 주요 요지였다. 이병철은 이 특집 좌담회에서 힌트를 얻고 곧바로 귀국하여 이승만 대통령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을 만나 유럽으로부터 차관을 통해 국제수준의 현대적인 대규모 비료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설명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만성 인플레이션에 헤매이는 한국경제의 변화를 위해 반드시 비료공장 사업을 성공시켜 달라고 격려하면서 외국 차관 승인 결재를 해주었다.

    1960년 2월, 이병철은 먼저 서독으로 가서 차관에 대한 협상을 하였다. 한국 정부의 신뢰, 이병철에 대한 신뢰 등으로 차관협상은 쉽게 성사되었다. 그리고 이병철은 기계를 도입하기 위해 세계적인 비료회사를 보유한 이탈리아로 찾아가 기계도입과 관련한 차관문제도 가볍게 마무리 지었다. 단숨에 서독과 이탈리아에서 차관 성사가 되자 한국비료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 4·19혁명과 이병철

    호사다마일까? 이병철이 외국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동안 한국에는 4·19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의 정치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차관 약속도 받는 등 비료공장 건립의 순조로운 출발이 한국의 정치 문제로 무산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마지막 차관 교섭 대상지인 미국 세계은행으로 갔는데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이 4·19로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자 상환 능력이 우려되어 차관을 꺼리는 것이었다. 이병철은 오직 하나 공장을 지어야겠다는 신념 때문에 모욕을 참아가면서 불리한 조건도 받아들이며 차관을 성사시켰다.

    허정 과도정부와 민주당 정권이 사회를 수습하려 하였지만 혼란은 지속되었다. 정치 변화로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간이 연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삼성은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주력으로 하는 삼성그룹 기업경영구조에서 20개가 넘는 계열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 15개 기업체가 모두 탈세 혐의로 조사까지 받았다.

    한편 삼성의 계열사 증가는 1950년대 후반 시중은행 민영화 추진으로 4개의 시중은행 최대 주주가 되면서 사업의 다각화로 인한 결과였다.

    은행 부채가 많거나 경영실적이 저조한 부실기업은 은행이 관리하였다. 이병철은 회생 가능성이 있거나 시장 진출 성공 가능성이 높은 기업을 인수, 경영참가를 하였는데 1950년대 후반 삼성이 설립하거나 인수한 주요 회사는 다음과 같다. 1957년 2월 한일은행, 동양제당, 천일증권 인수, 효성물산 설립, 1958년 1월 삼척시멘트 인수, 2월 안국화재 인수, 10월 상업은행 인수, 12월 제일모직 직매장 주식회사 장미라사 설립, 한국타이어 인수, 동일방직 인수, 근영물산 설립, 1959년 조흥은행 인수 등이다.


    # 삼성그룹의 시련

    1960년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발생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권력유지에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하야하고 말았다. 새롭게 들어선 과도정부는 1960년 4월부터 6월까지 약 50일 동안 부정축재 기업인들을 발표하고 그 대상자에게 지난 5년간 탈세에 대한 벌금을 면제해 줄 테니 자진신고를 하라고 유도하였다. 삼성은 6개 업체에 50억환 정도의 추징금을 통보받았다. 혼란스런 정치 시기에 이병철은 더 이상 항의하지 않고 정부의 방침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이병철은 한국의 경제, 한국의 농촌을 위해 비료공장 설립이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의지를 과도정부 기관에 전달하고 공장설립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훗날 드러난 일이지만 이 서류는 과도정부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행방불명이 된 상태였다.

    <이병철의 한마디> 메모하라. 최고의 기억력은 연필과 노트이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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