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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창가의 나무 한 그루- 손음(시인)

  • 기사입력 : 2021-10-07 20: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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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가의 나무는 조용히 비를 맞는다. 나무가 제 몸에다 잔뜩 꽃을 싣고 기린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시간을 기억한다. 나무의 이름은 벚나무이다. 흰 멍울 같은 꽃을 매단 나무는 상가동과 아파트 뜰 사이 혼자 자라 고적한 시절을 보냈다 한다. 2년 전 학원 이사를 고민하고 있을 때 오래된 이 상가에 늙은 벚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단번에 이사를 결정하였다. 그만큼 나는 집이든 직장이든 풀과 나무를 벗어나서는 무엇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

    부동산 계약을 끝내자마자 당장에 창을 가로막고 있는 ‘방범용 새시’ 철거작업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창으로 성큼 들어온 나무는 키가 크고 건강한 몸에 꽃망울을 틔우고 있는 게 아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벚나무는 밤이고 낮이고 불을 켠 듯 환한 흰빛을 쏟아냈다. 샘물 같은 바람이 나뭇잎을 마구 흔들어댈 때마다 나무는 수도승처럼 바람에 깊이 사무치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설레어서 누군가에게 불현듯 전화를 걸고 싶어지기도 하였다.

    한 그루의 나무는 무엇을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삶이 주는 피로를 걷어내고 위로를 가져다준다. 코로나 여파로 ‘비대면 수업’이 시작되면서 나는 한동안 고립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말을 섞고 몸을 스치며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냐며 일상을 향해 고독한 파문을 던지면서 살았다. 그즈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싶은 것이 없는 무기력한 시간을 창을 통해 나무의 시간을 온전히 갖게 되면서, 삶이란 늘 고달프고 아픈 것의 연속이라 깨달으며 생의 미열을 식히곤 했다.

    나무는 울창하게 가지를 뻗어 창의 이쪽을 한없이 들여다보고 있다. 아니 내가 그러한 나무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창의 안쪽에는 커튼과 조그마한 간이 부엌이 있다. 선반에는 꽃다발과 빈티지 찻잔이 있고 탁자와 간이 의자는 단출하다. 창이 넓은 이 부엌은 나무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면서 ‘기쁨과 근심’이 뒤섞인 감정을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어느덧 초록의 잎새가 노랗게 물이 들었다. 뜰에는 낙엽과 플라스틱 대야와 고양이 가족이 있다. 비가 그친 뜰에 찾아온 햇살은 담요처럼 따뜻하다. 헝겊 인형과 박스 더미를 집으로 삼고 있는 고양이들은 한가롭다. 그 모양을 보고 늙은 나무가 툭, 나뭇잎 한 장을 떨어뜨린다. 봄 여름을 무사히 지나온 나무는 이제 가을맞이를 하는 듯 자신의 무게를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파트 뒤뜰로 연결된 작은 길은 흰 가르마 같다. 목이 긴 소녀가 물과 사료를 놓아두고 가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오늘은 고양이 가족의 저녁 식사는 잊어도 좋겠다. 맞은편 복도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창을 조금 열어둔다. 나무도 이 피아노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오후 3시가 되면 피아노 선생은 혼자서 피아노를 친다. 언젠가 선생은 창밖의 나무가 아름답다며 커피를 내오기도 하였다. 피아노 음색 같은 발랄함이 있는 선생은 긴 머리가 노을빛이다.

    길 건너 신호등 앞에는 사람들이 서 있다. 무표정의 그들은 일제히 마스크를 쓰고 크렘린 궁 병사처럼 서 있다. 잠시 잊고 있던 코로나 시국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나의 순간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존재해야 사람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코로나가 물러나고 나면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저 창가에 서 있는 나의 나무를 소개하고 싶다.

    손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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