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6월 18일 (화)
전체메뉴

[작가칼럼] 우주에 가을이 왔다-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21-09-30 20:28:41
  •   

  • 비로소. 마침내, 드디어 등 기다림의 뉘앙스를 담고 있는 부사어는 어느 것을 앞머리에 놓아도 잘 어울리는 계절이 가을이다. 비로소 가을이고, 마침내 가을이고, 드디어 가을이다. 가을은 시간에 떠밀려온 게 아니라 안간힘으로 당도한 듯한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은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돌아오는 ‘계절’ 중의 하나라기보다는 차라리 공들여 다듬은 ‘작품’ 같은 느낌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작품을 완성한 자의 그것처럼 가을은 충만함과 허탈함이, 개운함과 서운함이, 기쁨과 아픔이 교차한다.

    이런 가을의 느낌과 분위기를 가장 잘 살려낸 노래가 바로 〈가을 편지〉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받아 주세요”. 이렇게 시작하는 〈가을 편지〉는 잘 알려져 있듯이 시인 고은이 노랫말을 짓고 가수 최양숙이 불러서 대한민국의 가을을 한층 깊고 감미롭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1971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이후에도 김민기, 패티킴, 이동원, 최백호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비단 가수가 아닌 장삼이사들도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마이크를 비껴들고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저마다의 청춘에 이별을 고했으리라.

    이 노래와 비슷하면서 또 다른 느낌으로 사랑받았던 가을 노래는 시인 박인환이 노랫말을 짓고 가수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을 들 수 있겠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이 노래는 박인환 시인이 ‘경상도집’이라 불리는 명동의 대폿집 ‘은성’에서 작곡가 이진섭, 가수 나애심 등과 술을 마시다 술값이 떨어져서 주인에게 술값 대신으로 즉석에서 써준 시에, 곁에 있던 이진섭이 곧바로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불렀다고 한다. 그로부터 3일 후 박인환 시인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그날의 그 노래는 남아서 가슴과 가슴을 관통하며 유전(流傳)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두 편 모두 노랫말이 빼어난 시(詩)이다. 굳이 노래가 아니어도 가을은 시로써 비로소 가을답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가 만드는 비극적인 가을이 있고,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만드는 경건한 가을이 있는가 하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만드는 성숙한 가을도 있다. 이렇듯 ‘가을 시’는 다양하고 그만큼 가을도 다양하다. 그중에 이런 가을 시도 있다.

    “몇 십 년을 두고 가슴에 든 멍이/누구도 모르게 품안고 살았던 멍이/이제 더는 감출 수가 없어/멀건 대낮/하늘에다 대고/어디 한번 보기나 하시라고/답답한 가슴 열어 보였더니/하늘이 그만 놀라시어/내 멍든 가슴을 덥석 안았습니다/온통 시퍼런 가을 하늘이”

    김형영 시인의 〈가을 하늘〉 전문이다. 도무지 지울 수 없는 멍을 하늘에게 보여주자 하늘이 깜짝 놀라 멍든 가슴을 덥석 안아준다. 아픈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건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더 아픈 사람이다. 그러니 내 멍을 덮어주는 건 더 큰 멍이라야 가능하다. 멍이라면 가을 하늘보다 더 큰 멍이 어디 있으랴. 가을 하늘은 그 자체가 멍이지 않은가. 가을이 아름다운 건 우리의 온갖 상처를 묵묵히 안아주는 저 높푸른 멍 때문이리라.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날을 기념해서 11월 1일을 우리나라는 ‘시의 날’로 정했지만, 나더러 다시 정하라고 한다면 10월 1일로 하겠다.

    ‘시월’은 곧 ‘詩月’이 아닌가. 마침내 ‘시월’이 왔다. 비로소 우주에 가을이 왔다.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