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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1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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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글씨가 공간을 바꾼다- 윤영미(서예가)

  • 기사입력 : 2021-09-06 20: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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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건물이 올라가면 용도가 무엇일까, 외부 마감재는 무엇을 사용해 색깔이 입혀질지를 곧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건물 안 넓은 벽면에는 멋진 글씨로 주인장 생각이 채워졌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그 글씨가 옛 선조의 깊은 글이라도 좋겠고, 고독한 시인의 시라도 좋겠다. 유명한 문장가의 글이 아니라도 누군가를 미소 짓게 해 줄 소박한 글 한 줄도 좋겠다. 건물의 주인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철학과 인생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글씨였으면 더욱 좋겠다.

    빌딩 숲 건축물을 바라보면서 20대에 하던 상상을 서른 일곱이 되던 해 내 집을 건축하며 실현해 보기로 작정했다. 1층을 창고처럼 뚫어버리고 한쪽 벽면 전체를 액자화 시켜 글씨로 채웠다.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6m 큰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이 벽면을 사람들은 주인보다 더 사랑하고 기억해 준다. 음악가나 춤꾼이나 글을 쓰는 작가들조차 욕심내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부러워할 때 자신 있게 한마디 던졌다. “절대로 돈이 많이 들어간 공간은 아니에요. 남들과 똑같은 가구, 똑같은 벽을 갖는 게 숨 막히게 싫었어요. 그래서 글씨로만 공간을 채웠는걸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벽이고 집주인 생각이 그대로 공간에 들어가 있지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를 알아채 버렸다. 신동엽의 ‘산문시’도, 한대수의 ‘행복한 나라로’ 노래 가사도 집 주인장의 의식이었다.

    TV 뉴스에서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건 관료들 뒤에 배경처럼 들어오는 큰 글씨이다. 접견실 카메라 불빛이 쏟아지는 앞에서 글씨가 말없이 공간을 채운다. 서예가의 습관으로 누구의 글씨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뒷배경 전체를 가득 채운 웅장한 글씨는 공간의 엄중함을 더해 준다. 글씨 앞에서 악수로 주고받는 사람들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어 주었고, 담소 나누는 그들을 빛나게 해 주었다. 이것이 사람 사는 공간에서의 글씨 역할이다.

    광화문 거리 교보문고 외벽에 대형 현판 글씨는 3개월마다 바뀌는 문장으로 사람들은 기억한다. 도시인들은 그 현판 글씨를 보고 다시 힘을 내 걸음을 빠르게 재촉한다. 이것이 공간을 이용한 글씨 역할이다.

    여행지를 돌아다니다 허름한 시골 식당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히 걸린 좋은 글씨 작품 한 점 만나게 되면 식당 주인이 보인다. 음식이 괜히 더 맛있고, 대강 끓여 올려진 된장국이나 조물조물 무친 나물 반찬 하나에도 주인장의 음식 철학이 보였다. 글씨는 공간에 인문학을 입히는 작업이다. 아무 말 없는 공간이 글씨 작품 한 점으로 사람과 소통을 한다. 글씨는 사람을 대신해 공간을 입힌다. 글씨를 보면 사람이 보이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 공간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얼마 전 34년 만에 바뀌는 경남교육연수원의 원훈 글씨를 쓰게 되었다. 넓은 공간에 큰 글자를 쓰는 것은 서예가로서도 여간 고민스러운 일이 아니다. 엄중한 공간인 대 강연장은 반듯한 판본체의 느낌으로, 긴장을 다소 풀어 줄 소 강연장은 편안하고 재미난 글씨체로 붓을 들어 첫 획을 시작했다. 표구된 대형액자를 마주하는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8m가량 되는 액자들이 걸리는 날 비로소 글씨는 공간과 한 몸이 되었다. 원훈이 주는 힘을 글씨가 받쳐주니 공간이 한결 따뜻해졌다. ‘성찰과 공감으로 함께 여는 역량 중심의 미래 교육’이라는 원훈이 서예가의 붓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교육자들이 오며 가며 무의식적으로 눈에서 가슴까지 새겨질 한 문장의 힘이 서예가의 글씨로 전달이 되어지는 것이다. 서예가는 믿는다. 펜의 힘이 강하듯 붓의 힘은 따뜻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글씨는 엄중한 공간의 금상첨화이고, 아름다운 공간의 화룡점정이다.

    윤영미(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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