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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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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폭염을 뚫는 사람들 (3) 창원 폐지수거인 고말순 어르신

더위·폐지 무게에 휘청이던 어르신 “땡볕도 감사… 비 오면 일 못하잖아”
그늘없는 거리 5분도 안돼 땀 비오듯
2.7㎞ 걷자 머리 핑 돌고 어지러워

  • 기사입력 : 2021-08-09 21: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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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지 줍는 일을 한 지는 25년이 됐어. 시작은 아픈 자식 약값인 2000원이 없어서였지. 그동안 이곳저곳 이사를 갔지만 폐지수거는 계속하고 있어. 처음에는 힘이 있으니 손수레를 끌고 다녔는데 이제는 몸도 많이 안 좋아서 힘들어. 그래도 아침마다 계속 나오고 있어. 이거 아니면 할 일이 없는 걸.”

    9일 오전 10시 창원시 의창구 팔룡동의 한 고물상에는 폐지수거 일을 하는 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손수레에 잔뜩 실은 폐지의 값어치를 받은 뒤 다시 손수레를 끌고 거리로 떠났다. 이들 사이에서 작은 유모차를 끌고 나온 고말순(81·여)씨. 홀로 살며 몸도 편찮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이곳을 찾는다. 유모차를 이용해 폐지를 수집하는 고씨는 고물상에 비치된 손수레를 바라보며 연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런 고씨의 아쉬움을 덜어주고자 고물상 주인의 동의를 받아 손수레를 빌려 함께 폐지수거 동행에 나섰다.

    고말순씨와 김용락 기자가 9일 오전 창원시 의창구 팔룡동 일대에서 손수레를 끌며 폐지를 수거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고말순씨와 김용락 기자가 9일 오전 창원시 의창구 팔룡동 일대에서 손수레를 끌며 폐지를 수거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고씨는 식당·유흥시설이 많아 폐지 배출이 잦은 창원역 앞 상업지역을 목적지로 삼았다. 고물상까지 왕복으로 2.7㎞ 정도 걸어야 하는 경로다. 가는 길은 생활도로로 쭉 이어져 가로수 등 자연 그늘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땡볕 아래에서 손수레를 끌며 주변 주택·식당·업체 앞에 버려진 폐지나 고철 등을 하나둘 수거해야만 했고 5분도 안 돼서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수레 내 폐지가 쌓여 노동 강도는 점차 강해졌다. 1시간가량 지나 상업지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폐지가 넘칠 정도로 쌓여 노끈으로 싸매는 고정작업을 해야만 했다. 고물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도 폐지수거는 계속됐다. 30㎏에 달하는 버려진 실외기도 실었다. 팔룡동 주택가를 지날 때에는 뜨거운 햇빛과 마스크로 인한 갑갑함에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폐지 무게가 더해진 120㎏에 달하는 손수레 운행도 점차 위태로워졌다.

    제9호 태풍 ‘루핏’의 간접 영향으로 전날부터 이날 새벽까지 비가 내려 오전 11시 습도는 80%를 기록했고, 기온도 30도까지 올라 후덥지근한 날씨가 이어졌다. 이날 창원지역은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상태. 하지만 고씨는 더위에 힘겨움을 토로하기보다 해가 뜬 것에 더 감사해 했다. “비가 오면 일을 못 하니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해. 폐지는 젖으면 고물상에서 받지 않으니 여름철 장마보다 차라리 폭염이 더 좋아.”

    이날 2시간가량 80㎏에 달하는 폐지·고철을 수거해 얻은 수입은 1만5000원. 고씨는 이 돈을 허리 통증 완화를 위한 물리치료에 쓸 계획이다. 폐지수거를 하는 와중에도 수차례나 가만히 서서 허리를 부여잡은 고씨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도 있었지만, 비용 문제 때문에 치료를 받으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현재 폐지 가격은 ㎏당 144원으로 1년 전보다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렇다고 폐지수거인들의 수입이 2배 더 증가한 건 아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식당 등에서 배출하는 폐지량이 줄었고, 그나마 늘어난 택배 박스는 대부분 폐지수거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아파트 등에서 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트럭을 이용한 전문 수거인도 늘어나면서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창원시에 따르면 2021년 5월 기준 노인 인구 15만4642명 중 620명이 재활용품 수거 업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시는 폐지수거인을 폭염 취약계층으로 설정하고 지난 6월부터 쿨토시, 선캡, 여름용 안전조끼 등을 지원하고 있다. 경남자원봉사센터에서도 폐지수거인을 대상으로 매년 손수레, 생필품 등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고씨는 아직까지 이러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며 취약계층들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구청에서 손수레를 제공해주겠다고 연락이 왔었다. 조금 늦게 답변했더니 시기가 늦어 제공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인들은 행동이 느리지 않으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노인 복지에 힘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씨와 함께 폐지수거를 끝낸 낮 12시. 해가 중천에 떠올라 기온은 32도까지 올랐지만 고물상에는 여전히 폐지수거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고물상에서 낮 시간대 활동 자제를 요청하고 있지만, 생계가 걸린 이들은 어김없이 손수레를 끌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거리로 나선다. 병원에 간다며 고물상을 떠난 길에서 작은 유모차에 폐지를 주워 담는 고씨도 마찬가지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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