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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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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877) 모도유독(慕경남도猶篤)

- 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오히려 독실하다

  • 기사입력 : 2021-04-27 08: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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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로서, 국제적으로 알려진 거의 유일한 학자다.

    그런데 퇴계는 평생 숨어서 학문만 한 것이 아니고, 문과에 합격해 벼슬이 부총리급인 좌찬성에까지 이르렀다. 본래는 학문만 하려고 했으나, 어머님이 원하고, 또 형들이 권유하기 때문에 1534년 34세 때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갔다. 그러나 그 시대는 세 번의 사화(士禍)가 있어 많은 선비 출신의 관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가거나 축출된 직후였다. 그래서 선비들이 공부를 멀리하고 기개도 없이, 간신들의 눈치나 보면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퇴계는 벼슬의 의미를 잃었는데, 1537년 모친상 이후로는 더욱 벼슬에 뜻이 없었다. 그때부터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하며 지냈다. 퇴계의 본 뜻은 성현의 학문을 밝혀 우리나라에 보급하는 것에 있었다.

    그러다가 1545년 을사사화 때는 간신 이기(李)에 의해서 삭탈관작(削奪官爵)을 당했다. 1550년에는 형님 온계(溫溪) 이해(李瀣)가 간신들에게 몰려 죽임을 당했다. 그 이후로 더욱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도산(陶山)에서 보내며,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신하로서 임금이 계속 부르는데도, 그냥 무심하게 있을 수만 없어, 10여 차례 벼슬에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1567년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선조(宣祖) 임금은 꼭 퇴계를 불러와 도움을 받고자 했다. 퇴계는 부득이 1568년 음력 7월에 서울로 올라와 벼슬에 취임했다. 그러나 선조는 진정으로 퇴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는 의도는 없고, 단순히 퇴계 같은 대학자가 자기 조정에 참여한다는 효과만 노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여러 번 간청하여 1569년 3월 3일에 윤허를 얻어, 4일 길을 나서 17일 도산서당(陶山書堂)에 도착했다. 마지막 귀향길이었다. 이후 고향에서 학문을 완성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1570년 12월 8일 서거했다.

    오늘날 퇴계를 배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남긴 글을 읽고, 학문과 생애를 연구하여 글로 남기는 것 등이 있다. 이런 방법은 정신적으로만 배우는 방법이다. 퇴계가 다닌 길을 직접 몸으로 따라 걷는 방법이 퇴계를 배우는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주최로 지난 2019년 양력 4월 퇴계 서거 450주년 되는 해에 퇴계 마지막 귀향길을 따라 걷는 행사를 진행하여 순조롭게 성공했다. 그러자 매년하자는 건의가 많아, 매년 하기로 결정했다. 2020년 4월에는 코로나로 준비만 하고 행사는 하지 못했다. 금년에도 코로나가 계속되고 있지만, 기다릴 수만은 없어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4명으로 구성된 대원들이 15일 경복궁을 출발했다. 14일간 걸어 28일 도산서원에 도착한다.

    오늘날 퇴계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다. 그러나 퇴계의 도덕을 흠모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더욱 독실해져 가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 慕 : 그리워할 모.

    * 道 : 길 도, 도리·이치 도.

    * 猶 : 오히려 유. * 篤 : 도타울 독.

    동방한학연구소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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