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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고양이의 본능이 놀랍다- 이이화(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

  • 기사입력 : 2020-12-01 20: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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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년한옥에 길고양이 가족이 산다. 아, 이제 가족이라고 하기가 모호하다.

    지난가을 꼬리 짧은 노란고양이가 어린 고양이 자매를 집마당에 데려다 놓았는데, 색깔대로 ‘크림이’와 ‘초코’(고양이 이름은 모두 중1 딸아이 솔이가 붙이는 대로)이다. 크림이는 새침데기 소녀같이 앉은 자세도 단정하고 하는 짓도 냉랭하다. 반면 초코는 어딘지 흐트러진 모습에 칠칠맞고 강아지처럼 붙임성이 있다. 능글맞은 시커먼 수컷 ‘뭉치’가 어슬렁거릴 때 크림이는 질겁하는데 초코는 다가가 몸을 부비고 입을 맞추고 한다.

    아직 어림에도 배가 불러오던 초코가 걱정되어 아내가 빨래건조대 아래 종이상자를 마련해 두고 옷가지를 깔아주었는데, 아이들이 등교하려는 늦은 봄날 아침 초코는 그 안에 빨간 핏자국을 남기며 네 마리 새끼를 낳았다. 어린애가 어린애를 낳았으니 이걸 어쩌나 다들 걱정이었다. 빗줄기가 들이치자 큰 상자를 구해다 집을 곳간 안으로 옮겼다. 눈도 뜨지 못한 것이 꼬물거리는 모습에 카메라를 꺼내니 한번은 초코가 크게 눈을 뜨고 노려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고 그날 저녁 곳간에서 초코도 새끼들도 사라졌다. 비는 내리는데. 어찌된 일인가 난리가 났다. 먹이를 먹으러 오던 초코를 며칠간 뒤밟아 은신처가 사랑채와 돌담 사이 수풀에 파묻힌 신발장 안임을 눈치챘다. 비가 와도 처마가 일차 가리고 수풀이 이차 가리니 그런 은밀한 곳을 어찌 알고, 한 마리씩 물어 옮겼을 것이니. 폰을 들이대며 영상을 찍은 나는 가족들로부터 여러 날 혼이 났다. 그 후로 새끼들은 꽁꽁 숨겼는데 거처는 폐목더미 속, 사랑채 마루 밑 등으로 몇 번 바뀌는 듯했다.

    몇 달 뒤 집에 있던 솔이가 드디어 초코가 새끼들을 데리고 마당에 나타났다고 했을 때 정말정말 그러냐며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그러고도 인기척만 나면 숨어버리는 새끼들 얼굴 보기가 영 어려웠고 초코만 먹이를 먹으러 나오거나 젖 먹이려 들락거렸다. 초코가 즐겨 앉는 자리는 부엌 창턱으로, 아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지켜보곤 한다. 닭가슴살이나 생선 따위를 아내가 물려주면 한입에 받아먹곤 했는데, 새끼를 낳은 뒤론 그것을 입에 물고 곧바로 새끼들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기특해 집에는 고양이의 온갖 먹이, 장난감들이 배달되어 왔다. 그러면서 2020년의 긴긴 장마기가 지났다.

    새끼들도 이제 초코를 따라 먹이를 먹으러 마당으로 나오고 뛰어놀고 초코는 쥐를 잡아다 새끼들 앞에 갖다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가을이 깊어졌다. 눈에 자주 띄자 이름들이 생겼다. 삼색이, 꼬몽이, 못난이, 치즈. 네 마리의 성격도 조금씩 드러났다. 새끼들은 가을이 다가갈 즈음 덩치가 초코와 비슷해졌다. 젖을 빨리느라 어미의 덩치가 쪼그라들었나 싶을 지경이다.

    이제 초코는 자주 보이질 않는다. 오랜만에 찾아와도 행동이 낯설어졌다. 날카롭게 주위를 경계하고 다시 야생으로, 소녀로 돌아간 듯하다. 부엌 창턱에 앉아서도 아내가 물려주는 것을 허겁지겁 자기만 먹고, 새끼들이 안기려 들면 이빨을 드러내며 떨쳐낸다. 홀로서기에 들었다. 엄마 품을 찾던 아이들이 머쓱해하며 물러나는 것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새끼들을 감싸던 날을 잊은 걸까? 서로 파묻혀 핥고 부비고 하던 날이 마치 꿈만 같다. 무엇이 그런 변화를 가져오는 걸까? 본능이 놀랍다.

    초코가 즐기던 창턱 자리는 이제 초코처럼 칠칠맞고 붙임성 있는 치즈가 자주 오르고, 빨래건조대 아래 밥그릇 근처도 주로 세 마리 새끼들이 둘러앉는다. 잿빛 새끼고양이 ‘못난이’는 돌담을 넘어온 너구리에 맞서 뒹굴며 전투를 치렀다더니, 없어졌다.

    크림이는 먹이 때면 찾아왔다 사라지는데, 농막으로 오르는 오솔길에서 길옆 덤불로 급히 숨는 크림이가 눈에 뜨였다. 그 뒤를 노란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따랐다. 집에서 1㎞는 떨어진 농막 입구에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초코를 만났다. 동짓달을 향하여 시월의 보름밤이 깊다. 자연으로 돌아간 그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이이화(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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