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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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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무죄추정의 원칙- 이수경(법무법인 더도움 변호사)

  • 기사입력 : 2020-11-15 20: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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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죄추정의 원칙이 가장 논란이 된 사건들 중 하나로 미국의 오 제이(O.J.) 심슨사건이 있다.

    오 제이 심슨은 1970년대부터 미식축구 사상 손에 꼽을 정도의 스타이자 영화배우로 미국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인물이다. 정작 미식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나라에는 오 제이 심슨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알려져 있다. 1994년 6월 12일 밤에 LA의 부촌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백인 여성과 남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여성은 오 제이 심슨의 전 부인 니콜 브라운이었고, 남성은 전 부인의 남자친구인 로널드 라일 골드먼이었다.

    당시 국민적 스타의 전처와 그녀 애인의 죽음이라는 이슈만으로도 매스컴의 관심은 급격히 높아졌는데, 경찰은 심슨이 과거에 니콜을 폭행한 전력, 심슨의 침실에서 발견된 니콜과 로널드의 피가 묻은 양말, 범행 현장과 심슨의 저택에서 각각 한 짝씩 발견된 피에 젖은 가죽장갑 등을 근거로 심슨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였다. 그 와중에 심슨은 경찰에 출두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스포츠카를 몰고 도주하였고 이를 경찰차 수십 대가 쫓는 장면까지 방송국의 헬기로 생중계되었다.

    여러 증거들과 심슨의 도주극을 봐서는 심슨이 범인이라는, 살인죄는 유죄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담당한 배심원들은 무죄 평결을 내었다. 심슨의 재판은 무려 113일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전 과정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심슨이 범인이라는 증거와 도주극이 있었던 상황에서, 더욱이 생중계를 통해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심원단은 어떻게 무죄평결을 할 수가 있었을까?

    경찰은 심슨이 유죄라는 많은 증거들의 채집과정에서 여러 실수를 저질렀고 변호인단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경찰이 제시한 피 묻은 양말에는 혈액 보존제까지 함께 발견되었고 대조 자료로 채취한 심슨의 혈액 중 일부가 사라졌으며, 결정적으로 피 묻은 가죽장갑은 정작 심슨의 손에 맞지 않았다. 특히 가죽장갑을 발견한 경찰이 인종차별주의자임이 드러나면서 경찰이 흑인인 심슨에게 불리하게 증거를 조작했다는 의심까지받게 되었다. 결국 배심원단은 심슨이 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경찰이 합리적 의심이 없는 입증을 했다고 볼 수 없었다는 이유로 살인에 대해 무죄평결을 한 것이다.

    흔히 알다시피,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에게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된다는 것인데, 사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형사재판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해낸 제도로, 그 전제로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이 아닌 이상 유죄인지 무죄인지 모르는, 실체적 진실을 알 수 없는 절대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근대시절에는 이러한 한계에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까지 사용했고 무고한 희생자들이 다수 나왔다. 결국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유래되었고, 이후부터 법은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실체적 진실을 발견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형사재판에서 검사의 공소사실에 대해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유죄라고 볼 수 없을 경우에 무죄로 판결하여 무고한 자를 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요즘에도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거나 알기 어려운 사건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 특히 유명인사가 연루된 성범죄 사건의 경우 많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확정되지 않은 사실관계로, 실체적 진실이 아리송한 사실관계로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입으로써, 글로써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린다. 미디어와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한번쯤은 심슨사건을 판정한 배심원단의 마음으로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수경(법무법인 더도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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