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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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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문풍지가 가르치는 지혜로- 김일태(시인)

  • 기사입력 : 2020-10-12 20: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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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는 가을걷이가 마무리될 때쯤 겨우살이 준비로 분주했다. 이때 집마다 제일 중요하게 여기던 월동채비는 김장하는 일과 방문의 창호지를 새로 바꾸어 붙이는 일이었다. 밥 외에 별다른 찬거리가 생산되지 않는 겨울철에 김장은 먹거리 준비의 상징이었고, 찬바람을 단속하여 포근하게 잠들 수 있도록 잠자리를 든든하게 챙기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겨우살이 채비였다.

    요즘 시골에는 모두 계량된 창호시설 속에 살고 있어서 생소할지 모르지만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골집들은 한지를 바른 격자무늬 방문이 많았다. 이 문살에 헌 창호지를 떼어내고 새 한지를 붙이는 일은, 적당한 크기로 종이를 자르고 풀칠하여 붙이는 단순한 일이라 가족이 합심하여 작업하였지만, 사실은 쉬운 듯해도 잘 붙이는 기술의 핵심은 문풍지를 적절한 크기로 잘 잘라 붙이는 일이었다.

    예전 한옥의 미닫이문은 문짝이 좌우로 밀고 당겨서 여닫기 때문에 문틀과 문짝이 빈틈없이 아귀가 딱 맞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 때문에 겨울이면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방안에 냉기가 돌았다. 그래서 문의 돌쩌귀가 달린 면 이외의 3면에 여분의 창호지를 문풍지로 달아 문틈으로 새어드는 찬바람을 막았다.

    이 문풍지가 외형으로는 단순하지만, 겨울철 외부의 찬바람을 막을 뿐 아니라 지네와 노린재 같은 벌레들, 또 밖에서 들어오는 먼지까지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방안의 습한 기운이나 냄새는 밖으로 통풍시키는 기막힌 지혜를 담고 있다. 이러한 물리적 효과 외에도 문풍지는 바람에 떨리는 소리가 그윽하여 시인 묵객의 감성을 자극하거나 그리움을 부추기기도 하였다.

    이 문풍지 효과는 요즘 현대식 건축물의 자재에도 많이 빌려 실내의 열 손실이나 벌레의 침입을 막는데 흔히 쓰이고 있고 특히 밖의 찬 기운을 차단하고 안의 땀과 수분은 배출하는 효과로 인해 등산용 첨단 의류 소재로 주목받고 있는 고어텍스도 문풍지와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요즘 세상살이가 즐겁거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주위에서 만나기가 어렵다. 코로나 19가 불러들인 폐쇄적인 일상으로 공동체가 실종되어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하는 소식들이 매일매일 줄을 이으며 차가운 겨울의 북서풍처럼 우리의 안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안방을 향한 이 외풍은 잦아들 기미가 없고 억지로 눈을 돌리려 해도 출구 없는 감옥에 갇힌 우리는 하소연하거나 끓어오르는 분통을 터뜨리며 해소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지는 모르겠으나 도덕과 부도덕, 공정과 불공정, 조리와 부조리, 평화와 불안이 서로 싸우도록 부추기고 있다. 그런데 이런 난장판이 워낙 오래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그 뜻도 헷갈리고 우리는 그저 쌈판이 지겹고 관람하는 데에 지쳐가고 있다.

    이런 즈음에 문풍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지혜를 좀 빌렸으면 좋겠다. 이제는 제발 이러한 분열과 갈등이 냉풍이 되어 우리 안방의 평화가 얼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생충이니 충견이니 당나귀 같은 흉측한 말들, 시의적절한 정책은 제시하지 않고 서로 책임 떠넘기거나 숨기거나 거짓말로 우리를 우롱하는 해충 같은 짓들이 더는 우리 안방의 문턱을 넘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분과 불행의 기운은 좀 밖으로 풀어 내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찬 외풍을 막아주고 나쁜 기운과 냄새는 밖으로 시원하게 배출해주는 문풍지 같은 묘책을 지난 추석 보름달 보며 빌듯이 고대해 본다.

    김일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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