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사람속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 함양 남계서원 이창구 원장

“서원 참모습 재현해 선비고장 명성 확고히 할 것”

  • 기사입력 : 2019-09-26 21:14:47
  •   
  •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함양 남계서원을 이끌어가는 ‘사단법인 남계서원’ 이창구(68) 원장을 만났다.

    함양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진주교육대학을 졸업한 이 원장은 제5대 도의원과 제5대·6대 함양군의원을 지냈다. 이 원장은 2013년 제5대 함양군수 보궐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이후 정계를 은퇴해 지금은 지역사회단체와 문화예술, 체육, 사회복지 등 다양한 단체에서 왕성하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남계서원과 인연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일두 기념사업회’라는 단체를 만들 때 처음부터 그 일원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사)남계서원을 설립하고 이사로 활동했다. 2016년 초대 원장 사퇴로 공석이 되자 원장 직무대리로 근무했으며 이듬해 3월 총회에서 원장으로 취임했다.

    이창구 원장이 지난 7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남계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던 순간을 회상하고 있다.
    이창구 원장이 지난 7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남계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던 순간을 회상하고 있다.

    원래 남계서원은 조선 명종(1552) 때 향유였던 개암 강익 선생의 주도로 전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웠으며, 1566년 임금으로 부터 ‘남계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이 원장은 “조선시대 서원의 건립 역사를 보면 제일 처음 세워진 서원이 풍기군수였던 주세붕 선생이 세운 백운동서원(현 소수서원)이다. 그러나 정작 이곳은 서원 이전부터 서당으로 쓰던 곳을 개칭해 서원으로 칭하였기 때문에 실상은 남계서원이 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고 말했다. 또 “남계서원 건립 이후 세워진 모든 서원들은 남계서원이 표준모델이 되었다”고 했다.

    남계서원 사당에 모셔져 있는 성현도 동방오현으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 선생을 비롯해 존현의 사상이 뚜렷한 개암 강익 선생, 병자호란 때 충절의 표상이 되었던 동계 정온 선생 등 세 분이다.

    그분들의 학문적 인간적 사상과 정신을 이어받아 후손들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는 존현양사(尊賢養士)의 교육목표가 뚜렷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 중 국립교육기관으로는 서울의 성균관, 지방의 향교가 그것이고 사립교육기관 초등교육은 서당, 고등교육은 서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 성균관이나 향교는 관리를 배출하는 과거에 주안점을 두었고 서원은 관리보다는 훌륭한 선비를 길러내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창구 사단법인 남계서원 원장이 남계서원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이창구 사단법인 남계서원 원장이 남계서원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남계서원 유네스코 등재 열정 쏟아= 사실 한국의 서원을 유네스코에 등재시키려는 노력은 지난 2011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국가브랜드위원회를 만들어 한국 성리학의 분신인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기 위해 문화재청과 9개 서원 통합서원 관리단이 힘을 합쳐 2011년 1차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했으나 미비한 점이 많았다.

    그때 유네스코 실사 자문단이 한국의 서원 9곳을 전부 돌아보고 몇 차례 검증을 했으나 2016년까지 심사기준에 미달해 그해 4월 반려통보를 받고 국가에서 먼저 등재신청서 전체를 자진 철회하게 된 아쉬움이 있었다고 이 원장은 전한다.

    이후 2016년 하반기는 마침 남계서원 전임 원장의 사퇴로 인해 몇 차례 진통 끝에 이창구 이사가 원장 직무대리로 선임돼 남계서원을 이끌게 됐다.

    그 시기는 1차 세계유산 신청 철회 이후 미진했던 서원들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시설 개수와 환경여건 개선 등 함양군과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쳐 서원 경내의 환경을 정비하고 노후된 고직사를 철거해 신축사업을 진행하는 등 서원이 면모를 일신하는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유네스코 실사단의 8개 분야 전문가들로부터 최종자문을 받아 2018년 1월 제2차 세계유산등재 신청을 통보하는 등 유네스코로부터 예비실사를 거쳐 2019년 1월 최종 신청서를 접수했다. 5월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유산 등재가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 지난 7월초 문화재청과 9개 서원 통합관리단, 9개 서원 대표단이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리는 총회장을 찾아갔다고 이 원장은 말했다.

    이번 총회에서 세계유산 신청국가는 총 38개국이었는데 한국의 서원은 19번째 심사 대상국으로 7월 6일 오후 3시 30분경 174개 회원국 중 21개 위원국이 심사한 결과 만장일치로 한국의 서원이 등재 결정됐다는 것이다.

    심사위원장의 등재가결 망치가 두드려지는 순간 도포와 갓을 쓰고 회의장에서 기다리던 우리 대표단의 환호와 만세소리에 온 회의장 전체가 한국의 날로 바뀐 듯했다고 이 원장은 전했다. 이어 모든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로 화답해줘 그때의 감격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었다고 이 원장은 소감을 밝혔다.

    9개 서원 중 남계서원은 경남에서 유일한 서원이고, 함양의 역사로 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산은 전무후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남계서원 운영 방안 계획은= 이 원장은 “이제 세계인의 자랑거리가 됐으니 그에 걸맞은 시설을 갖추고 운영방침도 잘 세워 국가와 서원이 힘을 합쳐 잘 보존 관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남계서원의 당면과제는 서원을 찾는 참배객과 관광객들의 안내와 홍보를 할 수 있는 교육관이나 연수시설의 건립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또한 템플스테이처럼 서원스테이를 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서원의 참모습을 이해하고 선비체험을 통해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모습을 재현하는 남계서원이 됐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원장은 “앞으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에 만족하고 안주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것이다”며 “서원의 참모습과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바로 예부터 내려오는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선비고장의 명성을 확고히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창구 원장이 걸어온 길= 이 원장은 함양에서 초·중·고를 나온 뒤 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함양 위성초등과 수동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78년 제9대 국회 때 산청, 함양, 거창 출신 국회의원이며 대한테니스협회장인 정우식 의원과 테니스로 인연이 되어 교직을 그만두고 의원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95년부터 1998년 제5대 경남도의원, 1998, 2002년 민선군수에 도전해 낙선한 후 2006년 제5대 함양군의원, 2010년 제6대 군의원(의장)을 지냈다.

    이어 2013년 제5대 함양군수 보궐선거에 출마해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셔 정계를 완전 은퇴하게 됐다.

    이 원장은 70년대 함양청년회의소, 95년에는 함양로타리클럽에 입회해 활동하면서 지구 봉사상을 수상했으며 캄보디아, 필리핀 등지에 국제봉사활동에 앞장서 왔다.

    70년대 초부터 함양군체육회 이사로 도민체전에 참가하고 테니스 협회장을 역임해 함양군 테니스 보급 발전에도 기여했다.

    또 함양군 승마협회 창립과 함께 유소년 승마단을 창단해 전국소년체전 중등부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해 체육분야에도 많은 활동을 했다.

    이 원장은 정계를 은퇴하고 봉사단체, 체육분야, 문화예술분야 등에서 활동하면서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함양교육상, 함양군 체육상 등 수많은 표창을 받았다.

    글·사진=서희원 기자 sehw@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서희원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