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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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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블루스 시즌4-어제, 오늘 그리고 청춘] 함양방짜유기장 전수장학생 이상운 씨

쉼없는 두드림으로 쉼없이 전통 잇는다

  • 기사입력 : 2019-09-24 20: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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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르스름한 빛깔에 잡티 하나 찾기 어려운 깨끗한 광택. 손끝에 느껴지는 서늘함과 매끄러운 감촉. 치솟는 불기둥과 수천 번의 두드림을 거쳐 탄생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우리의 전통문화인 황금빛의 놋그릇이다.

    놋쇠를 녹여 부은 다음 다시 두드려 만든 놋그릇을 ‘방짜유기’라고 한다. 함양군은 예로부터 전통 방짜유기의 산실이었다. 함양군 서상면과 서하면의 경계에는 과거 함양 방짜유기의 명성을 엿볼 수 있는 꽃부리징터가 있다. 함양은 땔감을 구하기 쉽고 인근 합천 지역에 ‘동(銅)’ 산지가 있는 데다 차갑고 깨끗한 물이 있어 유기공방이 성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10여개 남아 있던 이곳의 공방들도 이후 기계화 등으로 점차 사라졌다. 특히 이때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농악놀이 등이 규제되고, 징, 꽹과리와 같은 전통악기들이 점차 설 자리를 잃으면서 함양 징의 역사도 사라지게 됐다. 그러다 방짜유기 명인인 오덕수(1920~1978) 선생으로부터 기능을 전수받은 함양 출신 이용구(84) 선생이 인근 거창에서 방짜유기 공방을 열었다.

    그의 첫째 아들인 이점식(62) 촌장은 아버지의 방짜유기 기능을 전수받아 함양방짜유기촌을 세우면서 함양 꽃부리징의 명성을 잇게 됐다. 이 촌장은 지난 2017년 12월 경상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44호 함양방짜유기장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함양방짜유기장(경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44호) 전수장학생 이상운씨가 함양군 서하면 함양방짜유기촌의 전시관에서 방짜유기 제품을 바라보고 있다./김승권 기자/
    함양방짜유기장(경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44호) 전수장학생 이상운씨가 함양군 서하면 함양방짜유기촌의 전시관에서 방짜유기 제품을 바라보고 있다./김승권 기자/

    놋쇠덩어리가 황금빛깔의 그릇이나 악기로 거듭나기까지 온전히 견뎌야 하는 열기와 두드림은 이를 만드는 장인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고됨이다. 이 촌장의 집안은 이러한 ‘인고의 시간’을 3대째 이어가고 있다.

    지난 22일 함양방짜유기촌에서 우리의 전통문화이자 가업을 잇고 있는 29살 청년 함양방짜유기장 전수장학생 이상운씨를 만났다. 그는 이 촌장의 아들로 3년 먼저 입문한 세 살 터울의 형인 창훈(32)씨에 이어 함양 방짜유기에 뛰어든 막내다.


    함양방짜유기장 전수장학생 이상운 씨

    ◇땀 한 방울 두 방울

    이날 함양방짜유기촌 내 전통 유기공방에서는 숯을 가득 품은 화덕에 불길이 타올랐다. 치솟은 불기둥의 온도는 800℃에 달했다. 거무스레한 놋쇠덩어리는 고온의 불기둥에 달궈지며 점차 선홍빛으로 물들어갔다.

    화덕 앞에서 집게로 이를 붙잡고 서 있는 이씨의 얼굴도 덩달아 붉게 물들었다. 굵은 땀방울도 얼굴에 맺혔다. 부지깽이로 들출 때마다 재가 된 숯은 불똥이 되어 날아올랐고, 공중에서 식은 재들은 곧바로 이씨의 머리와 어깨 위로 떨어졌다.

    구리와 주석을 78대22로 섞어 1200℃ 이상의 고온에서 융해시켜 방짜쇠를 만든 뒤 이를 숯불에 달궈 여러 명이 수없이 두들기며 모양을 만들어간다.

    이렇게 무독성·무공해 금속으로 만들어진 방짜유기는 단순히 쇳물을 거푸집에 넣고 굳힌 주물유기에 비해 강도가 강한 데다 잘 휘거나 깨지지 않는다. 보온·보냉 효과도 뛰어나며 농약성분 등에 오염된 물질이나 일산화탄소와 같은 유해한 성분과 접촉하면 변색해 그 내용물이 오염됐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상운씨가 공방에서 담금질할 징을 화덕에 올려놓고 작업을 하고 있다.
    이상운씨가 공방에서 담금질할 징을 화덕에 올려놓고 작업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생명의 그릇’이라고 일컬어지는 방짜유기. 하지만 작업 중 발생하는 뜨거운 열기와 눈부심, 탁한 공기, 쉼없는 메질과 망치질, 시끄러운 소리 등은 작업자들에겐 여간 고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기계를 도입한 현대식 공장도 운영하고 있지만 쇳물을 녹이는 작업, 마지막 가질과 연마 등에는 어김없이 작업자의 섬세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힘든 일임에도 이씨는 땀방울이 그득한 얼굴을 옷소매로 훔치며 괜찮다는 미소를 기자에게 지어 보였다.

    이상운씨가 함양방짜유기촌의 현대식 공장에서 꽹과리의 피막을 벗겨내어 놋쇠의 광택을 내는 가질 작업을 하고 있다.
    이상운씨가 함양방짜유기촌의 현대식 공장에서 꽹과리의 피막을 벗겨내어 놋쇠의 광택을 내는 가질 작업을 하고 있다.

    이씨는 “일을 마치면 피로감에 온몸이 젖는다. 눈도 빨개지고 귀에서는 ‘삐-’하는 이명도 곧잘 들린다. 공방에 쇳가루에다 먼지도 많아 머리를 감으면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기도 한다”면서도 “아버지, 형, 그리고 함께 일하시는 분들이 잘 이끌어주셔서 고된 일임에도 버틸 수 있다. 그리고 함양 방짜유기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단순히 해외에서 유기를 수입해 자기가 만들었다고 도장만 바꿔서 싼값에 판매하는 곳이 적잖게 있는 걸로 아는데, 우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우리의 손으로 만든다”고 강조했다.

    이상운씨가 공방에서 징을 담금질하고 있다.
    이상운씨가 공방에서 징을 담금질하고 있다.

    ◇불 끄는 소방관을 꿈꾸던 청년

    이씨는 2013년 함양 방짜유기에 입문해 2017년 전수장학생이 됐다. 그렇지만 이씨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들의 일터이자 형과 자신에겐 놀이터였던 유기공방이 자신의 일터가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원래 꿈은 소방관이었다. 대학도 부산의 모 전문대학교 소방 관련 학과에 진학했다. 군 제대 이후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씨는 “어린 시절 학교와 집이 멀다 보니 하교 이후에는 집에서 형과 노는 일이 잦았다. 공방이 놀이터였고 망치 등 공구나 유기그릇이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며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이 일 자체가 육체적으로 굉장히 고된 데다 나와 맞지 않은 것 같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설사 하고 싶다고 해도 바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아버지를 비롯해 공방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모두 전문적인 기술자이신데 내가 배워도 잘할 수 있을까, 폐만 끼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만 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또한 늘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용돈벌이 삼아 공방에서 일하던 중에도 도가니에 담겨 있던 쇳물이 튀어 형이 머리 쪽에 화상을 입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며 “오히려 할아버지, 아버지가 하던 위험한 일이어서 이를 위해 소방관을 꿈꾸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이씨의 생각이 변한 것은 아버지의 병환 때문이었다. 지난 2013년 이씨의 아버지는 작업 도중 갑자기 쓰러졌다. 병원은 아버지에게 위림프종 암 진단을 내렸다. 그때부터 이씨는 편찮은 아버지를 도와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다행히 초기에 발견됐다.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지만 많이 나아지셨다”며 “아버지와 형을 도와 일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가 만류하셨다. 수십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하시면서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속 설득했다. 편찮은 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다는 제 뜻에 어머니도 결국 동의해주셨다”고 말했다.

    ◇가족간의 정으로 지켜나갈 방짜유기

    이씨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한 거창의 유기공방, 그리고 아버지 때 세운 함양의 유기공방 등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이씨의 형은 함양방짜유기촌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이씨는 거창 쪽을 맡을 예정이다. 그렇지만 두 공방이 분리되진 않는다. 거창에서는 쇳물을 녹여 방짜쇠를 만들어 반 정도 완성된 제품을 가져오면 함양에서 이를 완성한다. 함양 방짜유기 공정이 반으로 나뉘어 있는 셈이다. 이는 두 형제가 서로 경쟁하며 반목하기보다는 서로가 함께 협력하여 발전해나가길 바라는 부모님의 바람에서였다. 현재 전수장학생인 두 형제는 내년에 있을 함양방짜유기장 이수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씨는 “앞으로도 형과 함께 함양 방짜유기의 명맥을 잘 이어갈 것이다”며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으로 만들어온 방짜유기의 형태에서 벗어나 요즘 시대에 맞는 모양도 추구하고 있다. 일전에 만들어보다가 실패하긴 했지만 계속 시도해 더 나은 유기를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안대훈 기자 ad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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