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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6월 27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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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비상해라- 김현숙(수필가)

  • 기사입력 : 2019-03-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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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글픈 보고서가 신문 사회면을 덮었다. 돈이 필요한 학생들이 제약회사의 ‘신약임상시험’을 자처하고 있었다. 시험의 목적은 의약품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증명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실시한다는 임상시험에 아이러니하게도 피험자가 ‘사람’이다. 물론 세포실험과 동물실험을 거친다고는 해도,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시험이 과연 이타적인 명분에 맞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틀 동안 154㎖가량의 피를 뽑는다. 신약의 이상반응과 효능을 이 피로 검사하는 것이다. 그 돈으로 밀린 월세를 갚고 남은 돈으로 교통카드를 채운다. 시간에 쫓기지 않아 투잡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수당이 높아 그들 사이에서 이런 일은 ‘꿀 알바’로 통했다. 이 스스럼없는 매혈이 꿀만큼 달고 귀족처럼 격이 서는 일거리라니….

    ‘영등포 공고 야간학부에 다니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신군은 아버지 제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혈액 1그램에 10환짜리 매혈을 결심했다. 하지만 신군은 결국 고향에 가지 못했다. 사후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인지 목숨을 잃고 말았다.’ 1955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의 한 부분이다

    호구지책으로 매혈을 일삼는 이들이 그 시절에도 있었다. 그들을 가리켜 ‘쪼록꾼’이라 불렀는데, 쪼록거리며 병속으로 끌려가는 피를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피를 돈과 바꿔야 하는 아픔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이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100층 이상의 빌딩이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가는 지금의 매혈이 더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

    아들 생각이 났다. 녀석은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모든 강의를 사흘 안으로 몰았다. 알바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서는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몰아놓은 강의 때문에 괜히 공부만 힘들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어쨌든 애쓰고 있으니 격려까지 아끼지는 않는다. 하나 미련두지 않으려는 아들이 마냥 기특하지만은 않다. 현실 때문에 놓아버린 그것이 ‘달관’이 아니라 ‘포기’라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학기보다 더 바쁜 방학을 보내는 학생이 어디 내 자식뿐일까. 문자 그대로의 매혈은 아니지만 ‘피땀 흘려 번 돈’이라는 비유가 과장으로만 들리진 않는다. 그들이 피 같은 시간을 쪼개어 버는 것이 ‘효도’도 아니고 제 용돈도 아닌 학비벌이라면, 우리가 공통으로 가져야 할 감정은 대견함이 아니다. 등록금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보면서 ‘그래 잘 하고 있어’라는 격려를 못했었다. 그런 응원이 필요 없는 세상을 아직까지 못 만들었다는 한탄에, 서러움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우주까지 에스프레소가 배달되는 시대다. 세상 모든 것이 흐름에 순행하다 못해 앞질러 가고 있는데 유독 우리 청춘들만 제자리걸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화살이 되어 간’ 쌍 팔년도 그 청춘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책임과 이유가 어디에 있든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자책이 앞선다.

    아들아, 딸들아. 가난만이라도 벗어나려 했던 네 할아버지 세대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자. 하지만 막연한 청사진만 제시하는 네 아버지 세대에겐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어느 세대보다 뛰어난 역량을 지닌 너희가 이전 세대가 넘긴 빚에 떠밀려 벼랑 끝에 섰구나. ‘더 가난한 세상을 만들어 넘겨준’ 우리가, 공부할 돈이 모자라 피를 파는 너희를 나무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절벽이 되면 안 된다. 어리석은 답습은 더 이상 따라하지 말자. 무거운 관습은 벗어 버리자. 그리고 너희의 가장 큰 무기인 용기와 자유로움을 도약대로 삼아 날아올라라. 그 절벽 끝에서 비상해라. 너희들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김현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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